로맨스는 출판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소설 카테고리이면서, 동시에 장인정신이 필요 없는 장르처럼 취급받는 카테고리이기도 하다. 모든 작품이 똑같이 쉬운 일을 하고 있고 독자들 사이의 의견 차이도 그저 취향 문제일 뿐 실제로 무엇이 로맨스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지와는 무관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은 다르다. 로맨스 독자들도 다른 어떤 독서 커뮤니티 못지않게 치열하게 싸운다. 그리고 그 싸움은 몇 가지 정해진 지점에서 반복된다. 인스타 러브는 게으른 설정인가, 삼각관계는 그냥 편법인가, 남주의 반성 서사는 결말을 정당화할 만큼 충분한가, 스파이스 레벨이 정말 뭔가 의미 있는 정보를 주는가, 보장된 해피엔딩이 오히려 긴장감을 죽이는 건 아닌가, 소유욕 강한 남주를 좋아한다는 건 독자에 대해 뭔가 불편한 사실을 말해주는 건 아닌가.
아래 여섯 가지 의견은 별다른 검증 없이 굳어버린 통념에 반박한다. 어떤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 취향을 존중해달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건 나한테 안 맞았다”와 “이건 객관적으로 결함이다”를 구분해달라는 얘기다. 북톡 담론이 평소에 그리 넉넉하게 내주지 않는 구분이다.
인스타 러브는 게으른 설정이 아니다 — 슬로우번의 실패작이 아니라 다른 도구일 뿐이다
“인스타 러브”는 묘사보다는 욕에 더 가깝게 쓰인다. 한두 챕터 만에 서로에게 빠져버려서, 마치 작가가 로맨스를 설득력 있게 만드는 작업 자체를 건너뛴 것처럼 취급된다. 이 불만에는 슬로우번이 원래 정답인 페이스이고 그보다 빠른 건 다 지름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전제는 두 구조의 관계를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 슬로우번은 끌림이 “도착”하는 과정 자체에 분량을 쓴다. 독자에게는 이미 뻔한 사실을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인정하느냐가 긴장의 핵심이다. 반면 인스타 러브는 완전히 다른 곳에 분량을 쓴다. 이미 서로에게 끌리는 두 사람이, 강제로 맺어진 동맹이나 집안 간의 원한, 전쟁, 둘 다 선택하지 않은 운명의 짝 서사 같은 외부 압박이 그 끌림을 시험하기 시작할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다. J. R. 워드의 『블랙 대거 형제단』이나 크레슬리 콜의 『불멸의 사냥꾼들』 시리즈가 즉각적이고 종종 초자연적으로 강제된 끌림에 그토록 크게 의존하는 이유는, 이야기의 진짜 긴장이 스파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 즉 서로 선택하지 않은 두 사람이 그럼에도 진짜 관계를 쌓아갈 수 있는지에 있기 때문이다. “둘이 맺어질 것인가”보다 못한 질문이 아니다. 그냥 다른 질문일 뿐이며 이 질문을 던지려면 빠른 출발이 필요하다.
인스타 러브가 자기 기준에서 실패하는 건 스파크 이후에 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무것도 없을 때다. 끌림과 근접성만으로 이미 플롯이 완성됐다고 여기고 두 사람이 실제로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을 하나도 두지 않을 때 말이다. 반대로 즉각적인 연결이 더 긴 게임의 첫 수일 뿐일 때는 성공한다. 슬로우번의 페이스 기준으로 이걸 평가하는 건 단거리 선수한테 왜 마라톤을 안 뛰냐고 나무라는 것과 같다.
삼각관계는 편법이 아니라 플롯의 탈을 쓴 캐릭터 묘사다
삼각관계는 로맨스와 YA를 통틀어 가장 게으른 장치로 취급된다. 주인공이 결정을 못 내리는 걸 핑계 삼아 분량을 늘리고 애써 얻어내야 할 드라마를 그냥 우유부단함으로 때운다는 것. “삼각관계”라는 단어만 나와도 반사적으로 눈을 굴리는 독자가 워낙 많아서 등장 자체를 읽기도 전에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런 비판은 잘 만든 삼각관계가 실제로 진단하는 대상을 놓치고 있다. 그 대상은 주인공의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캐릭터 자체다. 『헝거 게임』에서 캣니스가 피타와 게일 사이에서 흔들리는 건 전쟁 서사와 관심을 다투는 로맨스 서브플롯이 아니다. 캣니스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창이다. 피타는 경기장이 없었다면 캣니스가 됐을 자아를 대변하며 게일은 경기장이 그녀를 만들어가고 있는 자아를 대변한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건 사랑을 고르는 척하지만 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르는 일이다. 『트와일라잇』에서 벨라가 에드워드와 제이콥 사이에서 갈라지는 건 좀 더 투박하지만 기본 작동 원리는 같다. 두 남자가 아니라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을 밖으로 꺼내 보여준다.
삼각관계는 작가가 시리즈 권수를 더 늘려야 해서 우유부단함을 가장 값싸게 끌어다 쓸 때, 선택 안에 별다른 캐릭터 정보가 담기지 않을 때 실패한다. 반대로 “틀린” 선택지가 정말로 매력적이며 그 선택이 단일 상대 로맨스로는 보여줄 수 없었던 주인공의 어떤 면을 드러낼 때는 성공한다. 삼각관계가 게으르다는 비판은 대개 특정 작품의 실행 문제인데, 이걸 구조 자체에 대한 판결로 착각한 경우가 많다.
반성 서사에서 그로벨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 건너뛰는 쪽이 진짜 실패다
남주가 크게 잘못한 뒤 — 거짓말을 하거나, 배신하거나, 사라지거나, 사랑하는 사람 대신 자존심을 택하거나 — “너무 쉽게” 용서받는다는 불만은 로맨스 독자들 사이에서 단골 메뉴다. 이 장르가 나쁜 행동을 계속 봐준다는 식이다. 특정 책을 겨냥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반성이라는 관습 자체를 겨냥한다면, 즉 용서받을 여지가 있는 잘못을 저지른 남주는 모두 이 장르가 캐릭터에게 책임을 안 묻는다는 증거처럼 취급된다면 얘기가 다르다.
이런 비판이 대개 놓치는 게 바로 그로벨이다. 남주가 용서를 그냥 받는 게 아니라 그 용서를 위해 애써야 하는, 종종 진짜로 불편할 만큼 길게 이어지는 구간 말이다. 로맨스 독자들이 이 대목을 얼마나 잘 써냈는지 판단하는 자기들만의 용어를 따로 쓸 정도로 뚜렷한 관습이다. 리사 클레이파스의 『겨울의 악마』에서 세바스찬 세인트 빈센트의 서사가 자주 인용되는 이유는, 이 책이 그를 사과 한마디로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변화는 서사적으로 편리하게 마무리해도 될 시점을 한참 지나서까지 그가 실제로 하는 행동을 통해 눈에 보여야 한다. 좋은 그로벨은 남주의 변화에 구체적이고 입증 가능한 대가를 치르게 함으로써 재결합을 정당화한다. 그냥 선언만 하는 게 아니라 말이다.
진짜 실패는 남주가 용서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책이 그로벨을 건너뛰고 사과나, 심지어 그냥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만으로 그로벨과 동등하게 취급할 때다. 이건 타당한 창작 비판이다. 다만 그건 그로벨이 빠졌다는 비판이지, 반성 서사 자체가 설계 결함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이 관습이 존재하는 이유는 애초에 “왜 그를 용서하는가”라는, 이 장르가 계속 회피한다고 비난받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스파이스 레벨로 책을 평가하는 건 엉뚱한 걸 재는 셈이다
스파이스 레벨, 그러니까 로맨스 소설의 성적 묘사가 얼마나 노골적인지 표시하는 불꽃이나 고추 척도는 이 장르에서 가장 많이 검색되고 가장 많이 논의되는 지표 중 하나가 됐다. 이유는 타당하다. 독자는 책을 펼치기 전에 뭘 보게 될지 알 권리가 있다. 문제는 이 담론이 스파이스 레벨을 완성도의 대리 지표처럼 다룰 때 생긴다. 마치 불꽃 다섯 개짜리 책이 두 개짜리보다 자동으로 더 만족스럽다는 듯이, 혹은 저스파이스 책은 뭔가를 아끼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수위는 콘텐츠를 재는 잣대지 케미를 재는 잣대가 아니다. 알리 헤이즐우드의 『러브 하이포시스』는 중간 정도의 수위에 머물면서 밀당, 능력, 서서히 쌓이는 긴장으로 거의 모든 걸 만들어내는데, 이 책의 팬덤은 훨씬 수위 높은 책들의 팬덤 못지않게 열성적이다. 이 소설이 만들어내는 긴장이 장면의 노골성이 아니라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의 축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반면 대사가 밋밋하고 두 주인공 사이에 실질적인 장애물이 없는 불꽃 다섯 개짜리 책은 묘사가 아무리 노골적이어도 공허하게 읽힐 수 있다. 쌓아올린 긴장이 없는 수위는 그냥 안무일 뿐이기 때문이다. 세라 J. 마스의 『가시와 장미의 궁정』과 레베카 야로스의 『포스 윙』 둘 다 스파이스 척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런 장면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플롯과 세계관, 캐릭터에서 상당한 작업을 해놓는다. 열기가 책을 혼자 끌고 가는 게 아니다.
이 척도는 콘텐츠 경고이자 독서 기분에 맞는 필터로서는 분명 유용하다. 다만 독자가 이걸 책의 완성도를 가늠하는 잣대로 쓰기 시작하는 순간 쓸모를 잃는다. 완성도와 수위는 같은 서가에 우연히 나란히 놓인, 서로 다른 두 축이기 때문이다. 저스파이스인데 몰입감 넘치는 책도 있고 하이스파이스인데 기억에 안 남는 책도 있으며 이 격자 어디쯤에나 위치할 수 있다. 불꽃 개수는 페이지에 뭐가 있는지 알려줄 뿐, 그 페이지가 읽을 가치가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보장된 해피엔딩은 장르의 약점이 아니라 긴장을 작동시키는 엔진이다
문학소설 독자들, 그리고 가끔은 로맨스 독자 스스로도 이 장르의 보장된 해피엔딩을 일종의 반칙처럼 여긴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결말을 이미 알고 있으니 위기가 애초에 진짜였던 적이 없다는 주장이다. 두 주인공이 결국 맺어질 수밖에 없는 계약을 맺은 셈이라면, 실제로 걱정할 게 남아 있을 리 없다는 논리다.
이건 로맨스의 긴장이 애초에 뭘로 돌아가도록 설계됐는지를 잘못 짚었다. 해피엔딩은 로맨스 소설 긴장의 원천이 아니다. 다른 종류의 긴장이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고정점이다. 미스터리가 범인이 잡힌다는 걸 알기에 오히려 “어떻게” 잡히는지에서 서스펜스를 끌어내듯이 말이다. 『포스 윙』에서 바이올렛과 재든이 결국 맺어질지, 『당신에게 보낸 모든 편지』에서 라라 진이 피터를 택할지, 로맨스 독자는 여기에 서스펜스를 느끼지 않는다. 대신 거기까지 가는 데 무엇을 치러야 하는지, 각 캐릭터가 뭘 바꿔야 하는지, 마침내 맺어진 두 사람이 그럴 자격이 있는 커플이 되어 있는지에 서스펜스를 느낀다. 이건 오히려 순수한 플롯상의 불확실성보다 지탱하기 어려운, 캐릭터에 더 크게 의존하는 긴장이다. 결말이 아무 일도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보상은 여정에서 나와야 한다. 목적지는 애초에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이 확실성을 걷어낸다고 더 진지한 책이 되는 게 아니다. 독자와의 감정적 계약이 완전히 다른, 별개의 장르가 될 뿐이다. 로맨스 독자들이 이런 책을 집어드는 이유는 정확히 결말이 확보돼 있기 때문이다. 그 안전장치가 있기에 중간 부분이 견딜 수 없어질 걱정 없이 진짜 감정적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 이걸 약점이라 부르는 건 “예측 가능하다”와 “정당하게 얻어내지 못했다”를 혼동했기 때문이다. 잘 만든 로맨스는 후자인 적이 사실상 없다.
소유욕 강한 남주를 좋아한다고 독자에 대해 뭔가 실토하는 건 아니다 — 판타지 취향과 실제 지지를 혼동하는 쪽이 문제다
다크 로맨스와 컨템포러리 로맨스 모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남주 유형이 있다. 통제하려 들고 질투하며 여주를 지키거나 소유한다는 명분으로 그녀가 정한 선을 넘어서는 유형이다. 그리고 요즘 담론은 이 원형을 좋아하는 것 자체를 독자의 연애관이 의심스럽다는 증거로, 심하게는 이 장르가 독자에게 통제적인 행동을 로맨틱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이고 있다는 증거로 취급하는 쪽으로 점점 기운다. 아나 황의 『트위스티드』 시리즈나 소유욕 강한 남주가 나오는 컨템포러리·다크 로맨스 전반이 이런 비판을 끊임없이 받는다.
이 비판은 실제 창작상의 실패를 겨냥할 때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만하다. 통제적인 행동을 아무런 성찰도, 대가도, 균형추도 없이 그냥 제시하는 책, 마치 소유욕과 사랑이 동의어인 것처럼 다루는 책 말이다. 특정 작품에 대한 비판으로는 타당하다. 하지만 이 비판이 원형 자체나, 그걸 좋아하는 독자를 겨냥할 때는 훨씬 힘이 빠진다. 픽션이 마치 결과 없이 뭔가를 느껴볼 수 있는 통제된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지침서처럼 작동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소유욕 강한 남주 판타지를 즐기는 독자 대부분은 픽션 속 권력 판타지와 자기 연애의 모델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안다. 호러 독자가 생존 기술을 연습하고 있는 게 아니듯, 스릴러 독자도 살인 후 도주법을 필기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정말 쓸모 있는 구분은 “소유욕 강한 남주는 무조건 좋다” 혹은 “무조건 나쁘다”가 아니다. 어떤 책이 이 원형을 다루면서 자기가 뭘 묘사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있는가다. 그 강렬함이 여주가 그 안에서 나름의 주체성을 가진 것으로 그려지는가, 아니면 서사가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가운데 여주에게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것으로 그려지는가. 이건 책 한 권 한 권을 두고 물을 만한 진짜 창작 질문이다. “이 트로프를 즐긴다는 건 당신에 대해 뭔가 걱정스러운 걸 드러낸다”는 창작 질문이 전혀 아니다. 그건 책이 아니라 독자를 겨냥한 판단이며 대체로 그 판단을 내리는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걸 말해준다. 즐기고 있는 판타지 자체보다 말이다.
단순하다고 무시당하는 장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위에서 한 얘기가 로맨스 독자들에게 이런 논쟁을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페이스, 구조, 트로프 실행을 두고 이 정도로 구체적이고 세밀한 논쟁이 벌어지는 장르라면, 대충 소비되는 게 아니라 꼼꼼하게 읽히고 있다는 뜻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오히려 다른 데 있다. “이 인스타 러브는 스파크 이후 아무 걸림돌도 없었다”, “이 삼각관계는 시리즈 권수 늘리려고 있었다”, “이 그로벨은 건너뛰었다”, “이 수위는 그 밑에 쌓인 긴장이 없었다”, “이 소유욕 강한 남주는 서사적 제동이 전혀 없었다” 같은 정당하고 구체적인 비판이 얼마나 빠르게, 그 책이 실제로 뭘 하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같은 딱지를 단 모든 책에 적용되는 일괄 규칙으로 굳어버리는가다.
로맨스는 다른 어떤 베스트셀러 카테고리보다도 장인정신이 아니라 공식으로 취급받으며 무시당한다. 마치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평가할 게 더는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더 나은 태도는 익숙한 관습을 가진 다른 어떤 장르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태도다. 이 트로프의 존재 자체를 허용할지 말지가 아니라, 이 책이 이 트로프로 구체적으로 뭘 해내고 있는지를 묻는 것. 정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질문이다. 그리고 좋은 인스타 러브와 게으른 인스타 러브를, 제대로 값을 치른 그로벨과 지름길로 끝낸 그로벨을 실제로 구별해낼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최악의 사례 몇 편으로 서가 전체를 싸잡아 판단해버리는 대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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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 로맨스 소설에서 인스타 러브는 항상 안 좋은 설정인가요?
- 아니다. 인스타 러브는 슬로우번을 어설프게 흉내 낸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도구다. 끌림을 초반에 미리 깔아두고, 그 끌림을 두 사람이 압박 속에서 어떻게 다뤄나가는지에 분량을 쓰는 방식이다. 스파크 이후 아무 걸림돌도 없을 때 실패하고, 그 순간의 끌림이 더 긴 이야기의 시작점일 때는 제 몫을 한다.
- 로맨스 소설은 꼭 두 주인공이 맺어지는 결말로 끝나야 하나요?
- 장르 관습상 그렇다. 해피엔딩이나 최소한 해피 포 나우로 끝난다는 확실성은 로맨스를 다른 장르와 구분 짓는 핵심 요소 중 하나다. 이 확실성은 약점이 아니라, 미스터리가 범인이 잡힐지 말지가 아니라 어떻게 잡히는지에서 긴장을 끌어내듯, 로맨스가 두 사람이 맺어질지 말지가 아니라 어떻게 맺어지는지에서 긴장을 끌어내게 해주는 장치다.
- 로맨스 소설의 '스파이스 레벨'이란 뭔가요? 등급이 높을수록 더 좋은 책인가요?
- 스파이스 레벨은 보통 불꽃이나 고추 1개에서 5개 사이로 매기는 대략적인 척도로, 노출 없는 클로즈드 도어부터 완전히 묘사되는 수위까지 성적 묘사의 노골성을 나타낸다. 이건 콘텐츠를 재는 잣대지 완성도를 재는 잣대가 아니다. 감정적 긴장이 탄탄한 저스파이스 소설이 케미가 밋밋한 하이스파이스 소설을 가볍게 앞지르기도 하고,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등급은 뭘 보게 될지 알려줄 뿐, 그게 좋은 책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