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불을 켜두고 새벽 두 시를 훌쩍 넘긴 적이 있는가. 손에 쥔 건 SF 소설, 눈이 타들어 가는 건 아는데 다음 챕터가 너무 궁금해서 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그 느낌. SF 시리즈 정주행만의 매력이 바로 거기에 있다.
판타지나 로맨스 시리즈와 다른 점이 있다면, SF 세계관은 복리처럼 불어난다. 1권에서 스친 행성 이름이 5권에선 핵심 무대가 되고 2권에서 잠깐 언급된 과학적 원리가 8권 결말의 열쇠가 된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야기가 더 두껍고 넓어지는 경험, 이 리스트는 그런 시리즈만 골랐다.
정주행할 SF 시리즈를 고르는 기준
좋은 SF 시리즈라고 해서 모두 정주행에 적합한 건 아니다. 2권에서 힘을 잃거나, 나중엔 설정이 자기 모순을 일으키거나, 마지막 권이 앞의 기대를 배신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목록에 오른 시리즈는 모두 공통된 조건을 충족한다.
권수가 쌓일수록 세계관이 두꺼워진다. 매 권마다 새로운 역사, 정치 구조, 과학적 발견이 쌓이면서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반복이 아니라 축적이다.
인물이 진짜로 변한다. 1권에서 한 선택이 5권에서 의미를 갖는다. 세 권에 걸쳐 쌓인 관계가 배신당할 때의 무게. 이런 감정의 압축은 연속 독서에서만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결말이 여정을 배신하지 않는다. 9권, 혹은 6권을 읽고 나서 마지막 권이 허무하면 그 시간이 아깝다. 이 목록의 시리즈는 모두 엔딩을 제대로 쓴다.
스케일이 다른 스페이스 오페라
익스팬스 — 제임스 S.A. 코리
Leviathan Wakes 외 8편 | 총 9권
21세기 최고의 SF 세계관을 꼽으라면 익스팬스가 먼저 거론된다. 제임스 S.A. 코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두 작가(대니얼 에이브러햄, 티 프랜크)가 만든 이 시리즈는 태양계 전체를 하나의 살아있는 공간으로 그린다. 인구 과잉과 정치적 마비로 허덕이는 지구, 강한 규율로 똘똘 뭉친 화성, 그리고 소행성대의 벨터—중력 없는 환경에 적응한 나머지 이제는 행성 중력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1권 리바이어던 웨이크스는 벨트의 실종 사건에서 시작해, 태양계 전체를 위협하는 무언가로 번진다. 9권에 걸쳐 홀든, 나오미, 에이모스, 알렉스의 팀은 늙고 잃고 그래도 계속 나아간다. 6권쯤 되면 이들 사이의 짧은 대화 한 줄이 독자를 무너뜨릴 만큼 감정적 무게가 쌓인다.
플로팅이 드라마 시리즈처럼 구성되어 있어서 각 권이 독립된 이야기이면서도 전체 흐름을 앞으로 밀어낸다. 아마존 프라임의 TV 드라마화도 수작이어서 읽다가 시각적 참조가 필요할 때 병행하기 좋다.
정주행 플랜: 리바이어던 웨이크스와 칼리반의 전쟁으로 주말 진입. 거기서 멈추기는 어렵다.
레드 라이징 — 피어스 브라운
Red Rising / Golden Son / Morning Star + 3편 | 총 6권
‘폭발적’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시리즈가 있다면 레드 라이징이다. 색상 계급제로 지배되는 미래 화성, 최하층 레드 계급의 광부 대로우가 지배층 골드에 침투하는 이야기다. 헝거게임의 생존 서사와 왕좌의 게임의 정치극이 섞인 느낌인데, 에너지가 그 어느 쪽보다 세다.
브라운은 인물을 사랑하게 만든 다음 잃게 한다. 그것이 이 시리즈의 구조다. 원작 3부작(Red Rising, Golden Son, Morning Star)은 완결되어 있고 5~7일이면 정주행 가능하다. 이후 2부 3부작은 스케일이 더 크고 정치적으로 복잡해진다.
정주행 플랜: 원작 3부작을 먼저. 모닝 스타의 결말은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싶어진다.
따뜻한 SF: 우주의 가족들
웨이파러스 시리즈 — 베키 체임버스
The Long Way to a Small Angry Planet 외 3편 | 총 4권
‘코지 판타지’라는 장르가 있다면, 베키 체임버스는 SF 버전을 혼자 만들어냈다. 은하 곳곳에 하이퍼스페이스 통로를 뚫는 터널링 선박 웨이파러의 선원들—인간과 여러 외계 종족이 뒤섞인—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다.
권마다 독립적인 이야기라 어떤 순서로 읽어도 된다. 하지만 순서대로 읽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완전하게나마 서로에게 잘하려고 노력하는 우주’라는 초상이 권을 넘길수록 두껍게 쌓인다. The Long Way가 세계를 여는 책이라면, A Closed and Common Orbit은 감정적으로 가장 완성도 높고 Record of a Spaceborn Few는 가장 조용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하우스 인 더 세루리안 씨나 레전드 앤 라떼처럼 따뜻하고 잔잔한 판타지를 좋아한다면, 이 시리즈가 정확히 그 감각의 SF 버전이다.
정주행 플랜: 출판 순서대로. 첫 권은 느긋한 주말에, 이후 일주일에 한 권씩. 다른 SF보다 느리고 섬세하게 읽어야 제맛이다.
테이슈칼란 2부작 — 아르카디 마르틴
A Memory Called Empire / A Desolation Called Peace | 총 2권
아르카디 마르틴은 A Memory Called Empire로 2020년 휴고상을 받았다. 받을 만하다. 거대한 테이슈칼란 제국의 수도에 도착한 대사 마히트 드즈마레는 전임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궁정 정치, 언어 퍼즐,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 사이를 헤쳐 나간다. 정치 스릴러의 구조에 진짜 문학적 섬세함이 녹아 있다.
식스 오브 크로우스의 정치적 긴장감이나 에블린 휴고의 일곱 남편의 문화적 몰입감을 좋아했다면, 이 2부작은 그 감각을 은하 규모로 늘린 것이다.
정주행 플랜: 주말 두 번에 각 한 권씩. 두 권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이루므로 연달아 읽는 것이 좋다.
빠르고 재미있는 중독성 SF
머더봇 다이어리 — 마사 웰스
All Systems Red 외 | 중편 4편 + 장편 3권 이상
SF를 처음 읽거나, 너무 차갑거나 어렵다는 이유로 멀리했다면 여기서 시작하자. 머더봇은 자신의 제어 모듈을 해킹해 자유 의지를 얻은 경비 로봇이다. 이 로봇이 자유 시간에 하고 싶은 건 딱 하나, 드라마 시청이다. 자기 감정 이야기는 하기 싫다. 인간들이 왜 자꾸 감정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도 못 하면서 계속 그들을 구한다.
마사 웰스가 만든 머더봇은 현대 소설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 중 하나다. 초기 중편들은 각 180쪽 내외로 빠르고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웃기며 세 번째 권쯤에는 로봇이라고 선언한 주인공의 감정이 독자를 뭉클하게 만든다. 불안, 사회적 피로, 천천히 사람을 마음에 들이는 과정—그게 이 시리즈의 실제 주제다.
정주행 플랜: 초기 중편 4편(All Systems Red, Artificial Condition, Rogue Protocol, Exit Strategy)을 먼저. 주말 이틀이면 충분하다. 이 4편은 완결된 하나의 단위로 작동한다.
올드 맨즈 워 — 존 스칼지
Old Man’s War 시리즈 | 총 6권
75세 노인들을 징병해 성간 전쟁에 투입하는 미래 — 의식을 젊고 강화된 몸에 옮겨 싸우게 한다는 설정이다. 도덕적으로 불편한 전제이고,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그 불편함이 깊어진다.
존 스칼지는 SF에서 SF에서 산문이 가장 읽히기 편한 작가다. 빠르고 재치 있고 감성을 숨기지 않는다. 1권이 가볍게 들어오는 느낌이라면 이후 권들은 정치적, 철학적 복잡도가 더해진다.
정주행 플랜: 1~3권(Old Man’s War, The Ghost Brigades, The Last Colony)이 핵심 3부작. 완결 후 관심 가는 방향으로 계속 읽으면 된다.
뇌를 뒤흔드는 SF
삼체 3부작 — 류신
삼체 / 암흑의 숲 / 사신의 영생 | 총 3권
최근 20년간 가장 충격적인 SF를 꼽으라면 류신의 삼체 3부작이다. 한국에서도 넷플릭스 드라마화 이후 폭발적인 독자가 생겼고 전 세계 SF 독자들이 공통으로 꼽는 ‘반드시 읽어야 할 시리즈’다.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에서 시작해 현재의 물리학자, 그리고 수십억 년의 우주 역사로 이어지는 스케일이 갈수록 압도적이다. 1권 삼체에서 제시한 과학적 전제가 2권 암흑의 숲에서는 페르미 역설에 대한 가장 소름 돋는 설명으로 발전하고 3권 사신의 영생은 그 모든 것을 서막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신의 영생을 다 읽고 나면 인간 세상이 잠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감각을 경험한다.
켄 류의 영어 번역도 문학적으로 훌륭하지만, 국내 번역본도 고품질이어서 한국 독자에겐 오히려 한국어가 더 편하다.
정주행 플랜: 세 권 연속 독파. 1권이 좋다면 2권이 더 좋고 2권이 좋다면 3권이 경이롭다.
시간의 아이들 — 에이드리언 체이코프스키
Children of Time / Children of Ruin / Children of Memory | 총 3권
체이코프스키의 3부작은 인류 대신 다른 종들—특히 지능이 향상된 거미들—이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을 그린다. 거미줄로 소통하고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며 완전히 다른 사회 구조를 가진 존재들이 어떻게 언어, 종교, 전쟁, 문화를 만들어가는지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이 목록에서 가장 난이도가 있는 시리즈다. 체이코프스키는 독자에게 인내를 요구하고 그 인내에 응분한 보상을 준다. 시간의 아이들은 2016년 아서 C. 클라크 어워드를 수상했다. 2권 Children of Ruin은 두족류(문어류)를 다루고, 같은 방식으로 그 지능과 문명을 탐구한다.
정주행 플랜: Children of Time 한 권만으로도 완결된 경험이다. 더 원한다면 2권으로, 전체 그림을 원한다면 3권까지.
나에게 맞는 SF 정주행 찾기
SF가 처음이라면 고전 작가들—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보다 이 목록의 현대 시리즈에서 시작하는 편이 낫다. 고전은 훌륭하지만, 이미 다른 시대의 독자를 위해 쓰인 책들이다. 이 목록의 시리즈들은 그 고전들을 흡수한 뒤 현대 독자를 위해 쓰였다.
취향별 출발점:
- 속도감이 최우선: 레드 라이징 → 익스팬스
- 인물과 관계 중심: 웨이파러스 → 테이슈칼란 2부작
- 짧고 바로 빠져들고 싶다: 머더봇 다이어리 (첫 권 All Systems Red부터)
- 머릿속을 흔들어놓고 싶다: 삼체 3부작
- 진짜 낯선 지능을 만나고 싶다: 시간의 아이들
판타지 시리즈—식스 오브 크로우스나 가시와 장미의 궁정—를 즐겼다면 SF로의 도약이 생각보다 가깝다. 장르는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세계관을 쌓고 인물에게 감정을 걸고 그 무게가 시리즈가 끝날 때 전부 돌아온다. 무대가 요정 궁정에서 우주로 바뀔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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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 SF 시리즈를 처음 읽는다면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요?
- 마사 웰스의 머더봇 다이어리가 가장 접근하기 쉬운 입문작입니다. 분량이 짧은 중편소설 형태로, 드라마를 즐기고 싶어 하는 경비 로봇을 주인공으로 한 유머 넘치는 이야기입니다. SF에 낯설다면 베키 체임버스의 긴 여정이나 짧은 여행(국내 번역 제목 상이)도 좋은 출발점입니다. 인물 중심의 따뜻한 이야기로 SF의 차갑고 어려운 이미지를 걱정하는 독자에게 특히 잘 맞습니다.
- 주말에 끝낼 수 있는 SF 시리즈가 있나요?
- 머더봇 다이어리 초기 4편(All Systems Red, Artificial Condition, Rogue Protocol, Exit Strategy)은 각권 180쪽 안팎으로, 주말 이틀 동안 충분히 완독할 수 있습니다. 삼체 3부작은 분량이 상당하지만 2권 이후부터 독파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져 일주일 안에 완독하는 독자가 많습니다. 아르카디 마르틴의 테이슈칼란 2부작은 주말 두 번에 나눠 읽기 딱 좋은 구성입니다.
- 이미 완결된 SF 시리즈를 정주행하고 싶다면 무엇을 추천하나요?
- 완결 시리즈 중 최고는 익스팬스 9부작(제임스 S.A. 코리), 웨이파러스 4부작(베키 체임버스), 삼체 3부작(류신), 머더봇 초기 4편(마사 웰스)입니다. 모두 완결된 시리즈라 다음 권 출간을 기다리는 고통 없이 한번에 정주행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