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친밀함이 있다. 집이 아니라 벽이다. 텔레비전 소리가 넘어올 만큼, 말다툼 소리가 들릴 만큼, 한밤중 발소리의 리듬까지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얇은 벽. 이웃 로맨스는 두 사람을 한 지붕 아래 몰아넣지 않는다. 대신 더 은근한 방식을 쓴다. 서로 동의한 적 없는데도 상대의 패턴을 알아버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 둔다. 몇 시에 퇴근하는지 차 소리만 듣고도 알고 아침 일곱 시에 잠옷 바람으로 쓰레기 버리러 나온 모습까지 봐버린다. 그렇게 한번 본 일상은 다시 못 본 척할 수가 없다.
이게 이 트로프를 밑에서 굴리는 조용한 엔진이다. 그래서 해변 로맨스든 컨템포러리든 YA든 심지어 고전이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등장하면서도 좀처럼 질리지 않는다. 이웃 로맨스는 극적인 첫 만남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다. 초대한 적 없는 곁눈질이 수백 번 쌓이다가 어느 순간 상대를 원하는 마음이 선택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처럼 느껴지는, 그 축적의 이야기다. 이 트로프가 왜 이렇게 잘 통하는지, 어디서부터 읽으면 좋을지 정리해봤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계속 선택한 근접성
대부분의 억지 근접 트로프는 두 사람을 물리적으로 가둔다. 폭풍우, 계약서, 잠긴 방. 이웃 로맨스는 그보다 미묘하다. 엄밀히 따지면 아무도 갇혀 있지 않으니까. 옆집 사람은 언제든 문을 안 열어줄 수 있다. 진입로에서 손을 안 흔들 수도 있고 현관 불이 유독 늦게까지 켜져 있다는 사실을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있다. 근접성은 실재하지만 강제는 아니다. 그래서 매 순간의 마주침 아래에는 작고 부인 가능한 선택이 하나씩 깔려 있다. 굳이 알아챌 필요 없었는데, 그래도 알아챘다는 선택.
바로 이 부인 가능성이 트로프를 조용히 잔인하게 만든다. 인물들은 한동안 스스로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게 아니니까. 그냥 같은 시간에 진입로에서 자꾸 마주치고 알 필요 없는 디테일을 눈치채는 두 사람일 뿐이다. 둘 중 하나가 마침내 이걸 인정할 즈음이면 독자는 이미 몇 챕터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현관과 담장 너머로 그럴듯하게 부인하며 사랑에 빠져가는 과정을 쭉 지켜봐 왔을 테니까.
덕분에 이 설정은 억지스럽지 않게 오래 끌 수 있다. 폭풍우는 지나간다. 계약서엔 기한이 있다. 그러나 함께 나눈 벽은 어디 가지 않는다. 이웃 로맨스는 한 여름, 일 년, 심지어 시리즈 전체로 늘어나도 무리가 없다. 작가가 따로 개입하지 않아도 근접성이 매일 저절로 새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그냥 원래 살던 곳에서 계속 살기만 하면 된다.
결정적인 순간을 대신하는 사소한 일상들
이웃 로맨스는 한 번의 큰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낮은 강도의 접촉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구체성에서 성패가 갈린다. 설탕 한 컵을 빌리는 정도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삼 주 뒤 두 번째로 설탕을 빌리러 왔는데 사실 그게 그냥 핑계였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을 때, 그때 트로프가 제 몫을 한다. 잘 쓰인 작품들은 이런 사소한 왕래를 진짜 플롯처럼 다룬다. 계속 채워지고 다시 돌아오는 캐서롤 접시, 서로의 화분에 물을 주는 습관, 쓰레기통 순서를 둘러싼 말 없는 합의 같은 것들.
이 순간들이 효과를 내는 이유는 벌어지는 그 순간엔 절대 로맨틱하게 그려지지 않아서다. 잘 쓰인 이웃 로맨스에서 이웃집 토마토 화분에 물을 주며 이게 사랑 고백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은 없다. 그냥 예의라고 혹은 핑계라고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 자기기만 때문에 마침내 감정을 인정하는 순간이 그렇게 세게 다가온다. 독자는 이미 이백 페이지 동안 두 사람이 잔디 관리를 핑계로 서로에게 구애하는 걸 지켜봤다. 그동안 둘 다 그냥 이웃답게 굴었을 뿐이라고 우겼을 뿐인데도 말이다.
Beach Read, 여름 한철 옆집
Emily Henry의 Beach Read는 January와 Gus를 호숫가 옆집에 나란히 배치한다. 서로의 현관 불빛이 보일 만큼 가깝지만 놀러 가려면 여전히 걸어가겠다는 결심이 필요할 만큼은 떨어져 있다. 기한이 정해진 근접성이라 다른 이웃 설정과는 결이 다른 긴장이 생긴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뭔가 일어나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없이 끝나거나. Henry는 이 설정을 이용해 상처를 안고 방어적인 두 작가가 장르를 맞바꾸는 도전 속에서, 여름 내내 이어진 포치 앞 대화를 쌓아가며 서서히 서로에게 다가가게 하다가 결국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됐는지 인정하게 만든다. 겉으론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면서 속으론 엄청난 감정을 쌓아 올리는, 이 트로프의 가장 대표적인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Ugly Love, 복도 하나 건너
Colleen Hoover의 Ugly Love는 이 트로프를 실내로, 복도를 사이에 두고 사는 아파트로 옮겨온다. Tate와 Miles는 계속 마주칠 수밖에 없을 만큼 가까이 살면서도 상황이 너무 솔직해질 것 같으면 각자 문을 닫고 물러설 수 있을 만큼은 떨어져 있다. 복도는 이 책에서 진짜 대화가 벌어지는 장소이자 복잡해지지 않기로 약속한 두 사람이 그 약속을 계속 어기게 되는 중립지대가 된다. 볕 좋은 해변 로맨스 버전보다 훨씬 날것이고 감정적으로 노출된 버전이다. 매일 피할 수 없이 마주친다는 같은 핵심 장치가 화창한 여름 로맨스도, 복도 바닥에서 독자의 마음을 짓이겨 놓는 이야기도 다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99 Percent Mine, 어린 시절 옆집의 재회
Sally Thorne의 99 Percent Mine은 옆집 남자 버전 트로프에 십 년의 시간을 얹는다. Darcy와 Tom은 어릴 때부터 옆집에 살던 사이다. 소설은 성인이 된 두 사람을 다시 불러 모은다. Darcy가 할머니의 오두막을 물려받는데, 공교롭게도 지금은 시공업자가 된 Tom이 그 오두막 리모델링을 맡게 된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걸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무겁게 실려 있다. 그 덕분에 새로운 감정을 인정하는 일의 심리적 비용은 갓 이사 온 이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커진다. Thorne의 버전은 이웃 로맨스가 세컨드 찬스나 소꿉친구 구조와 얼마나 자연스럽게 겹쳐지는지 보여준다. 두 집 사이의 담장은 사실 진짜 장애물이었던 적이 없다. 진짜 장애물은 담장 저편에 있는 사람이 처음부터 계속 답이었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다.
Get a Life, Chloe Brown, 건물 관리인 이웃
Talia Hibbert의 Get a Life, Chloe Brown은 두 주인공 Chloe와 Red를 같은 거리가 아니라 같은 건물에 둔다. Red는 그 건물의 관리인이라 첫 장부터 이미 Chloe의 일상에 꾸준히, 반은 업무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이다. 이웃의 근접성에 전문성과 접근권이라는 약간의 힘의 차이까지 얹은 버전이라 할 수 있다. Hibbert는 이 가까움을 이용해 세상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두 사람, 방어적이고 정확한 Chloe와 느긋하고 편안한 Red가 결국 서로의 무방비한 진짜 모습을 보게 만든다. 이 트로프의 좋은 작품들이 다 그렇듯 로맨스는 반복 속에서 쌓인다. 같은 안뜰, 같은 계단,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그냥 안부 인사가 아니게 된 그 안부 인사들 속에서.
옆집 남자의 원형, Laurie
BookTok이 이 트로프에 이름을 붙이기 훨씬 전부터 문학에는 이미 그 원형이 있었다. Louisa May Alcott의 Little Women에 나오는 옆집 소년 Laurie는 어린 시절 내내 담장을 넘어 March 자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옆집이라는 설정이 하는 일은 지금도 그때와 똑같다. 정식으로 초대받지 않고도 한 가족의, 한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그 인물에게 슬쩍 쥐여주는 것. Jenny Han의 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는 같은 구조를 요즘 YA 정서로 다시 쓴다. Lara Jean의 삶에서 어릴 때부터 늘 옆집에 있었던 Josh는 가족처럼 익숙한 존재이면서도, 다르게 바라보는 순간 그동안의 익숙함을 조금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가깝다. 두 작품이 하는 말은 결국 같다. 이 트로프의 진짜 매력은 담장이나 벽이 아니었다. 늘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사실 내내 찾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 그 특유의 현기증이 진짜였다.
다른 트로프와도 잘 섞이는 이유
이웃 로맨스가 이렇게 오래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트로프와 겹쳐 놓아도 자기 색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도시 로맨스와 섞으면 이웃 관계는 이미 모두의 사정을 다 아는 작은 공동체 안의 한 가닥이 된다. 그만큼 공개적인 실수 하나의 파장도 훨씬 커진다. 99 Percent Mine처럼 세컨드 찬스와 섞으면 담장 하나는 쉽게 떠날 수 없는 지난 역사를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그럼피-선샤인과 섞으면 매일 피할 수 없이 마주치는 상황 덕분에 밝은 쪽 인물이 무뚝뚝한 상대를 조금씩 녹일 기회가 끊임없이 생긴다. 빌려준 공구를 구운 빵과 함께 돌려준다든지, 부탁도 안 했는데 잔디를 깎아둔다든지. 이 트로프는 굳이 책 한 권을 혼자 다 짊어질 필요가 없다. 그 유연함 덕분에 이웃 로맨스 자체가 주인공인 작품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로맨스에서 보조 장치로도 자주 등장한다.
훌륭한 이웃 로맨스와 그렇지 않은 로맨스의 차이
이 트로프는 흉내 내긴 쉬워도 제대로 살리긴 어렵다. 부실한 작품은 옆집에 산다는 설정을 그냥 지나가는 디테일로 다룬다. 그 지리적 조건이 실제로 의미를 갖도록 공들이는 대신 그저 두 인물을 한 장면에 넣기 위한 핑계로만 쓴다. 잘 살아남는 작품은 두 집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거의 또 하나의 인물처럼 대한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그 특정한 걸음, 상대의 부엌이 마주 보이는 창문, 담장, 복도, 수많은 작은 실랑이의 무대가 되는 공용 진입로. 작가가 누군가의 시야 한구석에 늘 걸려 있는 삶이 어떤 건지 실제로 고민했는지, 아니면 이웃이라는 설정을 어디서든 벌어질 법한 이야기 위에 그냥 얹은 장식으로만 썼는지 독자는 금방 알아챈다.
잘 쓰인 작품들은 커플이 맺어진 뒤에도 그 지리적 조건을 그냥 사라지게 두지 않고 계속 활용한다. 좋은 이웃 로맨스는 누구네 현관 불이 보이는지, 마당을 가로지르는 데 실제로 얼마나 걸리는지, 벽이 소리가 들릴 만큼 얇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같은 공간의 배치를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 거리를 재는 잣대로 계속 써먹는다. 마침내 그 마당을 우연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서 가로지르는 순간, 그게 이 트로프가 그동안 쌓아온 모든 걸 보상받는 순간이다.
이웃 로맨스 TBR,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가장 따뜻하고 문학적인 버전을 원한다면 Beach Read가 좀처럼 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두 작가의 한 여름치 현관 앞 그리움을 선사한다. 더 날것이고 감정적으로 벗겨진 버전을 원한다면 Ugly Love가 같은 장치를 아파트 복도로 옮겨와 어느 쪽도 쉽게 봐주지 않는다. 성인이 된 뒤의 근접성 위에 어린 시절의 역사까지 얹은 버전을 원한다면 99 Percent Mine이 정답이다. Get a Life, Chloe Brown은 이 트로프가 같은 거리가 아니라 같은 건물에서는 어떻게 변주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이 트로프의 문학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면 Little Women과 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가 옆집 소년이야말로 원래부터 이 트로프의 청사진이었다는 걸 증명한다.
이 트로프의 좋은 작품들이 하나같이 아는 사실이 있다. 아무도 우연히 이웃의 출퇴근 시간을 외우지 않는다. 아무도 우연히 현관 불빛이나 부엌 창문, 특정 자동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알아채지 않는다. 마음 한구석에서 이미 저 사람이 중요하다고 결론 내리지 않은 이상은. 이웃 로맨스는 운명적인 만남 한 번 위에 세워진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언제든 피할 수 있었던 근접성 위에, 그리고 둘 다 최대한 오래 입 밖에 내지 않으려 했던 이유들 때문에 한 번도 그 근접성을 피하려 하지 않은 두 사람 위에 세워진 사랑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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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 이웃 로맨스 트로프란 무엇인가요?
- 이웃 로맨스는 옆집이나 같은 복도, 같은 동네에 사는 두 사람이 의도적인 구애가 아니라 반복적이고 피할 수 없는 접촉을 통해 서로에게 끌리게 되는 로맨스 트로프다. 얇은 벽, 빌려주는 설탕, 우연히 들리는 말다툼, 그리고 서로의 궤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 위에서 감정이 쌓여간다.
- 이웃 로맨스 추천작이 궁금해요.
- Emily Henry의 Beach Read, Colleen Hoover의 Ugly Love, Sally Thorne의 99 Percent Mine, Talia Hibbert의 Get a Life, Chloe Brown, 그리고 고전적인 옆집 남자 원형을 요즘 YA로 재해석한 Jenny Han의 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를 꼽을 수 있다.
- 이웃 로맨스와 룸메이트 로맨스는 어떻게 다른가요?
- 룸메이트는 한 공간을 나눠 쓰기 때문에 서로를 피할 방법 자체가 없어 긴장이 압축된다. 반면 이웃은 각자 집이 따로 있어서 마주치는 순간 하나하나가 사실은 선택이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될 노크,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현관 불빛.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근접성을 두 사람이 계속 스스로 선택한다는 점, 그게 이웃 로맨스만의 아릿함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