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샤 앨런에게는 이번 시즌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메이플 힐스 대학교 졸업반을 앞둔 피겨스케이팅 선수인 그녀는 링크 보수 공사 때문에 남자 하키팀과 빙판을 나눠 써야 하는 처지가 되고 하필 짝이 된 상대는 팀 최고의 스타 선수인 네이트 리드입니다. 가벼운 만남을 전전하고 훈련을 밥 먹듯 빠지는 걸로 유명한 인물이죠. 둘 다 이 조합을 원한 적이 없습니다. 아나스타샤는 예전 연애에서 얻은 상처 때문에 누가 몸에 손을 대기만 해도 움찔하는 상태고 네이트는 무언가에 진지하게 마음을 쏟아본 적이 없기에 그저 매력으로 모든 걸 넘겨왔습니다. 해나 그레이스는 2022년 『아이스브레이커』를 직접 자가출판했고 그 뒤는 북톡이 알아서 해냈습니다. 인용구 편집 영상, 링크 사이드 티키타카 클립, 팬들의 열띤 반응이 맞물리며 이 책은 플랫폼을 대표하는 하키 로맨스 중 하나로 떠올랐고 이후 웬즈데이 북스가 판권을 인수해 정식으로 재출간했습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벌써 1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고요.
『아이스브레이커』가 통하는 이유는 단순히 스포츠물이라서도, 슬로우번이라서도 아닙니다. 그레이스가 이 로맨스 전체를 트라우마 자체가 아니라 동의와 회복 위에 쌓아 올렸다는 데 있습니다. 아나스타샤와 네이트 사이에서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그 과정은 항상 조율되고 속도가 맞춰지며 동의를 거치는데, 그 덕분에 마침내 수위가 올라가는 순간이 와도 그건 자극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차곡차곡 쌓아온 결과처럼 느껴집니다.
정확히 무엇에 끌렸는가
목록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레이스가 다루고 있는 구체적인 요소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포츠 로맨스’라는 태그는 워낙 범위가 넓어서 『아이스브레이커』가 그 안에서 하는 작업은 훨씬 특이하거든요.
이야기 전체를 굴리는 엔진은 강제로 붙어 있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나스타샤와 네이트는 서로를 선택한 게 아니라 일정이 꼬여서 매일 아침 같은 빙판 위에 서게 됐고 둘 다 바란 적 없는 매일의 접촉을 관계가 버텨내야 합니다. 여기에 츤데레 케미가 티키타카에 날을 세워주는데, 네이트의 여유로운 매력이 아나스타샤의 방어적이고 까칠한 겉모습과 부딪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둘 중 누구의 첫인상도 정확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납니다. 상처를 치유해가는 서사는 스포츠 자체보다 감정적 판돈을 훨씬 키우는데, 아나스타샤의 트라우마 때문에 신체적으로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그전에 반드시 신뢰부터 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아래에는 대학 스포츠팀 특유의 분위기가 깔려 있습니다. 라커룸, 원정 경기, 가족 같은 팀원들까지, 네이트를 둘러싼 세계에 생생한 현실감을 불어넣는 요소들이죠.
아래 소개하는 책들은 이 요소 중 하나 이상에 가장 힘을 준 작품들입니다. 빙판을 좇는 책도 있고 티키타카나 치유 서사, 혹은 팀 그 자체를 좇는 책도 있습니다.
『더 딜』 엘 케네디 — 원조 대학 하키 계약 로맨스
엘 케네디가 2015년 낸 오프캠퍼스 시리즈 1권은 음치인 아카펠라 가수 해나 웰스와 대학 하키팀 주장 개럿 그레이엄을 가짜 연애 계약으로 엮습니다. 해나는 짝사랑 상대에게 다가가고 싶고 개럿은 전 여자친구에게 새 애인이 생겼다는 걸 보여줄 진짜 같은 여자친구가 필요하죠. 거래로 시작한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배경으로 깔리는 훈련과 원정 경기, 끈끈한 팀 분위기는 그레이스가 네이트 주변에 세워놓은 세계와 놀랄 만큼 닮아 있습니다.
『아이스브레이커』처럼 『더 딜』도 원래는 마주칠 일 없었을 두 사람을 억지로 계속 부딪히게 만드는 계약 관계 위에서 굴러가고 둘 중 누구도 자기 마음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티키타카가 친밀감을 쌓는 역할을 대신합니다.
연결점: 로맨스의 중심에 선 대학 하키 스타, 두 사람을 계속 같은 궤도에 묶어두는 가짜 혹은 강제 계약, 그리고 티격태격하던 대화가 진심으로 서서히 넘어가는 흐름.
『힘』 사리나 보웬 & 엘 케네디 — 팀원 사이에서 천천히 타오르는 감정
사리나 보웬과 엘 케네디가 2016년 함께 쓴 이 소설은 어릴 적 단짝이었던 하키 선수 웨스 로우와 제이미 캐닝이 오랫동안 풀지 못한 감정을 안고 대학에서 재회하는 이야기를 1인칭 교차 시점으로 그립니다. 둘 다 먼저 원하는 걸 인정하려 들지 않고 슬로우번은 한 시즌 내내 이어지는 훈련과 원정,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물리적 거리 속에서 서서히 무르익습니다.
『아이스브레이커』가 일정 문제로 아나스타샤와 네이트를 억지로 묶어놓는다면 『힘』은 스포츠 그 자체로 웨스와 제이미를 묶어놓지만 두 소설 모두 경쟁 속 티키타카 아래로 끌림이 천천히 끓어오르게 놔두다가 한쪽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같은 인내심 있는 속도감을 공유합니다.
연결점: 두 주인공을 매일 마주치게 만드는 하키팀이라는 배경, 양쪽이 서로 다른 속도로 빠져드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교차 시점, 그리고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슬로우번.
『우리』 사리나 보웬 & 엘 케네디 — 첫 승낙 이후의 관계
『힘』의 직속 후속작인 보웬과 케네디의 2016년 소설은 웨스와 제이미가 실제로 사귀기 시작한 이후를 따라가며 프로 하키의 압박감, 대중의 시선, 그리고 밀당의 긴장이 사라진 뒤에도 관계를 지속시키는 더 어려운 과제를 다룹니다. 장르 안에서는 흔치 않은 시도입니다. 쫓고 쫓기는 과정이 아니라 그 이후를 정면으로 다룰 용기를 낸 작품이니까요.
『아이스브레이커』를 다 읽고도 아나스타샤와 네이트가 진짜 커플로서 살아가는 모습이 더 보고 싶었던 독자라면 『우리』에서 같은 감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웬과 케네디는 두 사람을 갈라놓았던 갈등 못지않게 함께 있는 커플의 현실적인 갈등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다는 걸 믿고 밀어붙입니다.
연결점: 첫 키스 이후로도 계속 이어지는 하키 로맨스, 그리고 사적으로만큼이나 공개적으로도 함께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커플.
『와일드파이어』 해나 그레이스 — 메이플 힐스 하키 세계관을 더 만나고 싶다면
해나 그레이스의 2023년 후속작은 『아이스브레이커』와 같은 메이플 힐스 대학교 세계관 안에 머물면서, 이번엔 네이트 주변 인물로 등장했던 잭과 조시를 중심에 세웁니다. 정신없던 하룻밤 사건이 둘을 한데 묶어놓고 뒤이은 로드트립은 둘이 계속 거리를 두는 걸 허락하지 않죠. 잭은 방어적이고 까칠한 반면 조시는 따뜻하고 거침없어서 이 조합만의 츤데레 케미가 차 안에 갇힌 강제 동행이라는 상황과 맞물려 새로운 긴장을 만들어냅니다.
『아이스브레이커』에서 가장 좋았던 게 그레이스가 그려낸 세계관 특유의 결 — 팀 분위기, 캠퍼스, 대화의 톤 — 이었다면 『와일드파이어』는 같은 세계관, 같은 목소리로 이어지는 가장 직접적인 다음 선택지입니다.
연결점: 『아이스브레이커』와 동일한 메이플 힐스 하키 배경과 주변 인물들, 츤데레 조합, 그리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로드트립이라는 강제 동행.
『체크, 플리즈!』 응고지 우카주 — 가족 같은 하키팀 분위기를 원한다면
응고지 우카주가 그린 이 웹코믹 겸 그래픽노블은 이스너상 후보에도 올랐던 작품으로, 피겨스케이팅 선수 출신으로 가상의 샘웰 대학교 하키팀에 합류한 에릭 ‘비티’ 비틀이 낯선 종목에 적응하고 가족 같은 팀원들을 사귀며 주장 잭 지머만을 향한 마음을 천천히 키워가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아이스브레이커』보다 톤은 훨씬 따뜻하고 포근하지만 라커룸의 정겨움과 링크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상은 똑같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이스브레이커』가 팀을 주로 네이트와 아나스타샤 이야기의 배경으로 쓴다면 『체크, 플리즈!』는 그 가족 같은 하키팀 문화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비티가 피겨스케이팅에서 하키로 넘어온 배경 역시 그레이스가 아나스타샤에게 설정한 종목 간 교차와 묘하게 겹칩니다.
연결점: 피겨스케이팅에서 하키 세계로 넘어오는 설정, 가족처럼 끈끈한 대학 팀, 그리고 매일의 링크 접촉 위에서 자라나는 슬로우번 로맨스.
『헤이팅 게임』 샐리 손 — 유리도 벨 것 같은 티키타카를 원한다면
샐리 손이 2016년 낸 이 소설은 한 출판사에서 나란히 붙은 책상을 쓰는 두 비서, 루시 허튼과 조슈아 템플먼을 같은 승진 자리를 두고 다투는 앙숙 관계로 몰아넣습니다. 눈싸움 대결이나 일부러 신경을 긁는 행동, 자잘한 심술을 점수 매기듯 주고받는 이들의 사무실 신경전은 스케이트만 뺐을 뿐 『아이스브레이커』 초반 링크 사이드 신경전과 똑 닮았습니다.
그레이스와 손 둘 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고 말하면서도 상대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캐릭터들이야말로 가장 날카로운 로맨틱 긴장을 만들어낸다는 걸 잘 아는 작가들입니다. 『헤이팅 게임』은 스포츠 대신 사무실을 배경으로 삼았을 뿐, 말싸움이 곧 밀당이 되는 구조는 완전히 똑같습니다.
연결점: 플러팅처럼 읽히는 날 선 앙숙 케미, 스포츠 대신 직장을 매개로 한 강제적인 매일의 접촉, 그리고 대화만으로 거의 다 굴러가는 슬로우번.
『트위스티드 러브』 아나 황 — 방어적인 남자와 몸을 되찾아가는 여자
아나 황이 2021년 낸 트위스티드 시리즈 1권은 오빠의 절친 집에 들어가 살게 된 에이바 첸을, 자신만큼이나 방어적이면서도 보호 본능이 강한 알렉스 볼코프와 한 지붕 아래 살게 만듭니다. 에이바에게도 신체적 친밀감을 어렵게 만드는 각자의 사연이 있고 황은 그레이스가 아나스타샤와 네이트에게 쓴 것과 똑같이 신중하고 동의를 우선하는 태도로 관계의 신체적인 측면을 하나하나 조율해 나갑니다.
『아이스브레이커』가 빙판 위에서 쌓인다면 『트위스티드 러브』는 함께 사는 집 안에서 쌓이지만 두 소설 모두 자기만의 속도로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 다시 배워가는 여주인공을, 그 까칠함이 사실은 그녀를 잃을까 봐 두려운 마음을 감추는 방식일 뿐인 남자 주인공과 나란히 세워둡니다.
연결점: 선택이 아니라 상황이 만들어낸 강제 동거, 자기만의 속도로 과거의 상처를 지나 친밀함으로 나아가는 여주인공, 그리고 무뚝뚝함이 실은 애정을 가리는 가면인 남주인공.
『비치 리드』 에밀리 헨리 — 떨어지지 못하는 이웃, 츤데레 케미
에밀리 헨리가 2020년 낸 이 소설은 창작 슬럼프에 빠진 로맨스 작가 재뉴어리 앤드루스를, 그녀만큼이나 따뜻하면서도 정반대로 어두운 분위기의 문학소설 작가 거스 에버렛의 옆집에 살게 만듭니다. 둘 다 같은 해안가에서 집을 물려받거나 빌리게 되면서 벌어진 일이죠. 여름 내내 이어지는 장르 바꿔 쓰기 챌린지가 두 사람을 매일 같은 궤도로 밀어 넣고 나머지는 츤데레 케미가 알아서 해결합니다.
스포츠가 빠진, 훨씬 잔잔한 버전으로 네이트와 아나스타샤가 통하는 이유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겉보기엔 정반대인 두 사람이 선택이 아닌 상황 때문에 강제로 붙어 있게 되면서, 사실 첫인상이 틀렸다는 걸 서서히 깨달아가는 이야기니까요.
연결점: 교과서적인 츤데레 조합, 로맨스가 아니라 상황이 만들어낸 강제 동행, 그리고 티키타카 아래 숨겨진 진짜 취약함을 서서히 드러내는 흐름.
『언허니무너스』 크리스티나 로렌 — 날 선 가짜 연애와 강제 동행
크리스티나 로렌이 2019년 낸 이 소설은 언니의 결혼식에서 신랑 들러리와 신부 들러리로서 늘 티격태격하던 올리브 토레스와 이선 토머스를, 식중독으로 나머지 하객이 전부 뻗어버린 뒤 둘만 남은 신혼여행에 억지로 함께 보냅니다. 좁은 공간에 갇혀 커플인 척 연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서, 늘 서로를 못마땅해하던 관계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아이스브레이커』처럼 이 설정도 서로의 겉모습을 대놓고 싫어하던 두 사람이 상황 때문에 억지로 붙어 있게 된다는 데서 출발하고 그 마찰 자체가 결국 관계가 서서히 풀려가는 순간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든다는 걸 크리스티나 로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연결점: 둘 중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강제 조합, 진짜 끌림을 감추는 날카로운 신경전, 그리고 강제 동행이 시간을 들여 ‘적’이라는 첫인상을 허물어가는 과정.
『아이스브레이커』 다음으로 갈 곳
네이트와 아나스타샤의 세계에 마음을 뺏겼다면 가장 자연스러운 다음 걸음은 그 세계 안에 계속 머무는 것입니다. 해나 그레이스는 『아이스브레이커』 이후로도 메이플 힐스 하키 세계관을 계속 확장해가며 같은 팀과 친구 무리 안에서 다른 커플들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계를 더 온전히 만나고 싶은 독자라면 첫 책 이후로도 계속 읽어나가는 게 좋습니다.
이 목록에 오른 책들을 하나로 묶는 것, 그리고 애초에 『아이스브레이커』가 북톡에서 그만한 화제를 모을 자격이 있었던 이유는 결국 같은 지점에 있습니다. 서로를 선택하지 않은 두 사람이 상황 때문에 붙어 있게 되고 둘 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티키타카 속에 진짜 감정이 실려 있다는 것.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 만큼 재미있으면서도 그 결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섬세해야 하니 균형을 잡기가 결코 쉽지 않은데, 그레이스가 자가출판 데뷔작 한 편으로 이 균형을 베스트셀러 목록까지 끌어올릴 만큼 잘 해냈다는 사실이 빙판 위 어떤 장면보다도 그의 이야기 솜씨를 잘 보여줍니다.
이 목록에 나온 링크와 로드트립, 슬로우번으로 TBR을 채우고 있나요? Bookdot에서 이 책들은 물론 다음에 읽을 모든 책까지 함께 기록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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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 『아이스브레이커』는 수위가 높은 편인가요?
- 네. 초반에는 티격태격하는 대화 위주로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수위가 확 올라가는 뉴어덜트 로맨스이고, 노골적인 장면들이 아나스타샤가 상처를 회복해가는 과정의 핵심 축으로 쓰입니다. 성폭력 관련 과거사와 상세한 정사 묘사에 민감한 독자라면 먼저 콘텐츠 경고를 확인하는 게 좋습니다.
- 『와일드파이어』를 읽기 전에 『아이스브레이커』부터 읽어야 하나요?
- 『와일드파이어』는 다른 커플의 이야기라 순서를 꼭 지킬 필요는 없지만, 『아이스브레이커』를 먼저 읽어야 해나 그레이스가 만들어낸 메이플 힐스 대학교와 하키·피겨스케이팅 세계관, 그리고 이후 작품까지 이어지는 조연들의 서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아이스브레이커』는 어쩌다 북톡에서 이렇게 화제가 됐나요?
- 해나 그레이스는 2022년 『아이스브레이커』를 직접 자가출판했는데, 틱톡 독자들이 네이트와 아나스타샤의 티키타카와 밀당 장면을 편집 영상과 인용구로 퍼 나르면서 순식간에 입소문을 탔습니다. 이후 웬즈데이 북스가 판권을 사들여 정식 출간했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1년 넘게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