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독자에게 선택받은 자 서사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대답보다 먼저 눈살부터 찌푸리는 경우가 많다. 농장 소년이 알고 보니 왕이었다거나, 고아 소녀가 알고 보니 고대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거나,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쓰인 예언에 얽매인 마지못한 십 대 주인공까지. BookTok 댓글창에 “선택받은 자”라는 말만 꺼내도 문장이 끝나기 전에 누군가 눈을 굴릴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독자에게 자신을 책 읽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작품을 꼽아보라고 하면, 십중팔구 선택받은 자가 그 답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해리 포터, 퍼시 잭슨, 마지못해서였지만 프로도 배긴스까지. 다들 졸업했다고 말하는 그 클리셰가 실은 자신을 키운 클리셰인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이 두 사실 사이의 긴장이, 단순한 눈 굴림보다 훨씬 흥미롭다.
선택받은 자를 선택받은 자로 만드는 것
운명을 짊어졌다고 해서 다 이 유형에 속하지는 않는다. 이 아케타입에는 다른 영웅 서사와 구분되는 몇 가지 핵심 조건이 있다.
- 개인의 야망이나 점진적 성취가 아니라 예언, 혈통, 마법, 운명 같은 외부의 힘이 선택한다
- 이 인물이 아니면 아무도 해낼 수 없는, 매우 구체적이고 우주적인 규모의 과업이 있다
- 출신이 운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무명이거나 가난하거나 평범해서 나중에 돌이켜보면 아이러니로 읽히는 배경을 갖고 있다
- 결국 그 역할을 맡게 될 거라는 서사 구조 자체가 필연처럼 짜여 있어서 성공 여부의 긴장을 얼마나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여기서 갈린다
이 마지막 지점이 클리셰가 갈라지는 진짜 경계선이다. 선택받은 자 이야기는 예언이 그 인물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끝까지 묻는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운명을 그냥 플롯을 굴리는 엔진 삼아 흥미로운 부분을 건너뛸 수도 있다. 독자들이 사랑하는 버전과 조롱하는 버전을 가르는 기준은 거의 언제나, 작가가 둘 중 어느 쪽에 진짜 관심이 있느냐다.
우리를 키운 예언, 해리 포터와 퍼시 잭슨
J. 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 속 해리 포터는 다른 선택받은 자들의 기준점이 되는 인물이다. 이 시리즈는 클리셰의 평판이 인정하는 것보다 예언이라는 장치를 훨씬 영리하게 다룬다. 해리를 지목한 예언, “둘 중 하나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그 문구는 시리즈 후반부에 가서야 사실 네빌 롱보텀이라는 다른 아이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었다는 게 드러난다. 볼드모트가 그 예언에 반응해 행동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현실로 만든 셈이다. 롤링의 선택받은 자는 우주의 법칙이 아니라 악당 본인의 편집증이 지목한 존재에 가깝다. 이 설정은 트로프가 보통 팔아먹는 그 확실성을 슬쩍 무너뜨린다.
릭 라이어던의 퍼시 잭슨과 올림포스의 신 시리즈 속 퍼시 잭슨도 비슷한 수를 쓴다. “가장 나이 많은 신의 혼혈”이 올림포스를 구하거나 파괴할 선택을 하게 된다는 대예언은 시리즈 대부분 동안 독자에게 당연히 퍼시 얘기라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실제로는 퍼시의 친구 루크의 서사가 퍼시 자신이 불멸을 포기하기로 한 결정과 맞물리며 벌어지는 일이다. 예언은 정확히 따지면 한 명 이상의 캐릭터에게 적용되고 그 결말은 필연이 아니라 선택에 달려 있다. 어린이 독자를 겨냥한 시리즈면서도 라이어던은 이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이 책들 속 운명은 보장이라기보다 누군가 능동적으로 이행하기로 선택해야 하는 일련의 조건에 가깝다.
예언이 함정일 때, 폴 아트레이데스와 빈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이 클리셰가 진짜 전복적일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사람들이 결국 가리키게 되는 작품이다. 허버트가 아예 그 전복을 설정 자체에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폴 아트레이데스는 아라키스에서 메시아 예언을 실현하지만, 그 예언 ‘리산 알 가입’은 사실 몇 세대 전 베네 게세리트가 만약을 대비해 프레멘 문화에 심어놓은 조작된 전설이다. 베네 게세리트 자신들의 요원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던 셈이다. 폴의 부상은 우주적 의미의 운명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심리 공작이 성공적으로 실행된 결과에 가깝다. 허버트는 이후 시리즈 내내 폴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성전이 승리가 아니라 재앙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듄』은 선택받은 자라는 틀을 빌려, 사람들이 메시아를 절박하게 필요로 할 때 벌어지는 일을 정면으로 캐묻는다.
브랜든 샌더슨은 『미스트본: 마지막 제국』에서 구조적으로 비슷한 수를 쓴다. 로드 룰러의 제국은 천 년 전 예언된 영웅이 세상을 구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실은 누군가 그 예언의 문구는 지켰지만, 조종에 능한 조언자가 그 의미를 비틀어버린 탓에 엉뚱한 사람이 그 힘을 손에 넣고 지금 이야기 속 인물들이 맞서 싸워야 할 폭군이 되고 말았다. 3부작의 중심인물 빈은 거리의 부랑아 출신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옛 예언과 똑같은 궤적을 되밟는다. 전설 속 ‘영웅’이 사실상 조종당해 괴물이 됐을 수 있다는 반전을 통해, 샌더슨은 이 클리셰 자체를 이야기의 전제가 아니라 핵심 미스터리로 바꿔놓는다.
거절했어야 할 선택, 린과 주충바
최근 판타지 중 가장 날카로운 작품 몇 편은 선택받은 자를 칭찬이 아니라 경고로 다룬다. R. F. 쿠앙의 『양귀비 전쟁』과 셸리 파커찬의 『그녀가 태양이 되었다』가 거의 이 발상 하나로 지어진 소설들이다.
『양귀비 전쟁』의 린은 전쟁고아로, 제국 최고의 군사 학교인 시네가드 입학시험을 통과하고 불의 여신 피닉스와 연결된 자신을 발견한다. 사실상 국가의 적을 상대할 파괴적인 힘을 다룰 수 있는 마지막 무녀인 셈이다. 쿠앙은 예상 밖의 시험 점수, 숨겨진 힘, 재능을 알아보는 스승까지 전형적인 기원 서사의 모든 비트를 린에게 준 다음, 그 어느 것도 독자를 안심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린의 힘은 그를 고귀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고립시킨다. 3부작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린은 실제 역사 속 참극에서 그대로 따온 선택들을, 어떤 선택받은 자 서사도 원래 주인공에게 허락하지 않는 그런 선택들을 저지르고 만다. 시리즈는 힘을 부여받는 것과 그 힘을 책임 있게 다룰 자격을 갖추는 것이 결코 같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녀가 태양이 되었다』의 주충바는 다른 각도에서 이 클리셰를 해체한다. 점쟁이가 가난한 소년 주충바에게 위대함을 예언한다. 이름조차 없이 아무것도 되지 못할 운명이라던 그의 여동생은 오빠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다 그냥 그의 이름과 운명을 통째로 자기 것으로 삼기로 한다. 파커찬의 소설은 선택받은 자 클리셰가 보통 감춰버리는 부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 책에서 운명은 발견되는 게 아니라 훔치는 것이다. 그것을 간절히 원할 만큼 대담한 사람이 차지한다. 3부작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은, 운명이 이 바꿔치기를 알아차릴지 모른다는 주의 두려움에서 나온다. 애초에 자신이 선택된 게 아니라, 그런 척할 배짱만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마지못한 이들, 프로도와 란드 알쏜
선택받은 자라고 다 그 역할을 원하는 건 아니다. 마지못해 떠맡는 버전에도 나름 길고 풍성한 전통이 있다.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속 프로도 배긴스는 예언이 아니라 상속과 우연으로 거의 얼결에 선택된다. 그리고 이 3부작은 그 선택이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유독 정직하게 그린다. 프로도는 여정을 마치고 승리에 취해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예전의 삶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없는 상태로, 샤이어가 치유해줄 수 없는 방식으로 다친 채 돌아온다. 톨킨은 ‘선택받는다’는 것을 명예라기보다는, 하필 잘못된 시각에 잘못된 문 앞에 서 있었던 평범한 사람에게서 뜯어낸 일종의 희생으로 다룬다.
로버트 조던의 시간의 수레바퀴 속 란드 알쏜은 이 마지못함을 공포의 영역까지 밀어붙인다. 랜드는 최후의 전투에서 어둠의 왕과 맞서리라 예언된 용의 환생이다. 그런데 그가 필요로 하는 그 힘을 다룰 수 있는 남자들은 역사적으로 예외 없이 그 힘에 깃든 오염 때문에 미쳐 죽어갔다. 열네 권에 걸쳐 조던은 랜드의 운명을 근사하게 그리는 대신 실제로 두렵게 그린다. 예언은 승리를 약속하기보다,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는 역할을 약속할 뿐이다. 이 시리즈의 감정적 중심은 주변 사람들이 그를 점점 한 인간이 아니라 상징으로만 대하는 와중에도 랜드가 자기 자신을 붙들고 있으려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 있다.
전설이 아니라 제비뽑기로 뽑힌 이들
최근 판타지 중 흥미로운 축은 예언을 아예 우회하고 거의 무작위 선발에 가까운 방식으로 주인공을 고른다. 그런데 이 방식이 오히려 다른, 그리고 만만치 않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만약 이야기가 다른 사람을 골랐다면 어땠을까.
나오미 노빅의 『업루티드』 속 아그니에슈카는 은둔한 마법사 드래곤이 10년마다 인근 마을에서 소녀 한 명을 데려가는 골짜기에서 자란다. 마을 사람들도, 아그니에슈카 본인마저도 늘 그가 훨씬 아름답고 재능이 뚜렷한 절친 카시아를 데려갈 거라 믿어왔다. 그런데 드래곤이 데려간 건 아그니에슈카였고 소설이 상당히 진행될 때까지 그와 독자 둘 다 시원한 설명을 얻지 못한다. 노빅은 이 어긋남을 의도적으로 활용한다. 아그니에슈카는 소설 내내, 처음엔 본인을 포함해 주변 모두가 실수라 여겼던 선발 과정을 의심한다. 그의 안에 있는 마법은 결국 진짜로 밝혀지지만, 노빅은 ‘이 자리에 안 어울린다’는 느낌을 더 관습적인 선택받은 자 이야기라면 진작 해소했을 지점을 훌쩍 넘겨서까지 붙들고 있게 만든다.
토미 아데예미의 『피와 뼈의 아이들』 속 젤리 아데볼라는 좀 더 고전적인 틀에 가깝다. 잠재된 힘 때문에 십 년째 마법을 잔혹하게 탄압해온 왕국에 마법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지목되는 무녀다. 다만 아데예미는 이 클리셰가 종종 신경 쓰지 않는 지점, 정치적 파장을 예언에 단단히 붙여놓는다. 젤리의 운명은 그저 개인적으로 위험한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의식이 성사되면 곧바로 위협받는 뿌리 깊고 폭력적인 권력 구조가 존재한다. 그 구조는 의식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온갖 동기를 갖고 있다. 소설은 젤리의 선택을 단순한 서사적 편의가 아니라, 억압받는 계급과 그들을 억압하는 왕정 사이의 구체적이고 잔혹한 충돌을 촉발하는 불씨로 다룬다.
선택받은 자 피로감, 사실은 칭찬에 가깝다
선택받은 자 피로감이라는 불만은 사실 아주 구체적인 실패 방식에 대한 불만인 경우가 많다. 캐릭터의 운명을 선언만 해놓고 독자가 그 대가나 무게, 위험을 전혀 체감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야기 말이다. 예언이 플롯의 모양을 정당화하는 용도로만 존재하고 주인공의 선택을 실제로 압박하지 못하면, 이 클리셰는 긴장감이 외과적으로 제거된 소망 성취물로 주저앉는다.
다만 그 피로감 자체가 이 트로프에 아직 힘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는 점은 짚어둘 만하다. 이미 죽어버린 장치를 두고 BookTok에서 만 자 넘는 댓글 논쟁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독자들이 선택받은 자를 두고 다투는 이유는, 운명이 지목한다는 설정이 자유의지와 결정론, 평범한 사람과 감당하기 벅찬 짐, 그리고 이야기가 캐릭터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캐릭터가 실제로 원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탐구하는, 픽션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튼튼한 엔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다룬 작가들은 이 클리셰를 폐기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파고들어 캐물었을 뿐이고 그건 단순히 질려버린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나만의 선택받은 자 TBR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한 권씩 시험해보고 싶다면.
- 고전으로 시작하려면: J. K. 롤링의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 한 세대의 판타지 독서 습관을 열어젖힌 그 예언
- 필연이 아니라 선택을 다룬 아동·청소년 버전을 원한다면: 릭 라이어던의 『번개 도둑』 — 확실성보다 선택에 관한 예언
- 날조된 신화로서의 운명을 보고 싶다면: 프랭크 허버트의 『듄』 —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메시아와 그 주변 모두가 치르는 대가
- 조작된 예언 미스터리를 원한다면: 브랜든 샌더슨의 『미스트본: 마지막 제국』 — 자기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선택받은 자 이야기
- 경고로서의 선택받은 자를 보고 싶다면: R. F. 쿠앙의 『양귀비 전쟁』 — 고귀하게 만들기는커녕 고립시키는 힘
- 훔친 운명을 원한다면: 셸리 파커찬의 『그녀가 태양이 되었다』 — 주어지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운명
- 마지못한 영웅을 원한다면: J. R. R. 톨킨의 『반지 원정대』 — 명예가 아니라 희생으로서의 선택
- 공포로서의 운명을 원한다면: 로버트 조던의 『세상의 눈』 — 자칫 정신을 대가로 요구할 수도 있는 예언
어떤 버전이 당신을 사로잡는지 지켜보자. 응원하게 되는 운명인지, 아니면 주인공이 끝내 거절하길 바라는 운명인지.
지금까지 응원해온 모든 예언과 반전, 마지못한 영웅들을 Bookdot에 정리해보자. 선택받은 자에게도 잘 정돈된 TBR은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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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 소설 속 '선택받은 자' 클리셰란 무엇인가요?
- 예언이나 혈통, 운명에 의해 특정 인물만이 거대한 악을 물리치거나 어떤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지목되는 주인공 유형을 가리킨다. 이야기에 태생적으로 무게감과 긴장감을 실어주지만, 작가가 별다른 고민 없이 이 설정에만 기대면 오히려 결말이 뻔해 보이는 부작용도 있다.
- 독자들은 왜 선택받은 자 클리셰에 질렸다고 말하나요?
- 보통 예측 가능성 때문이다. 주인공이 이기도록 정해져 있다면 개별 장면의 긴장감은 첫 페이지부터 이미 답이 나온 셈이라 힘이 빠진다. '선택받은 자 피로감'을 토로하는 독자들은 대개 예언을 그저 편리한 플롯 장치로만 쓰고, 그 운명을 짊어진 인물이 실제로 무엇을 대가로 치르는지는 들여다보지 않는 이야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 선택받은 자 클리셰를 잘 비튼 작품으로는 뭐가 있나요?
- 브랜든 샌더슨의 『미스트본』은 예언 자체가 악당에게 조작된 것으로 밝혀지고, R. F. 쿠앙의 『양귀비 전쟁』은 선택받은 힘이 주인공을 부패시키는 과정을 그린다. 셸리 파커찬의 『그녀가 태양이 되었다』는 원래 다른 사람의 것이었던 운명을 주인공이 훔쳐 가는 이야기이며,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메시아라는 존재 자체를 승리가 아닌 경고로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