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도서

읽고 나서 괜히 문단속을 두 번 하게 된 책들

Bookdot Team
#불안한 책#힐 하우스의 유령#레베카#비하인드 클로즈드 도어스#노란 벽지#심리 공포 소설#찜찜한 책#더 푸시#멕시칸 고딕#나사의 회전
문이 살짝 열려 있는 어둑한 복도

모든 찜찜한 책이 독자를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니다. 여기 모은 책들은 더 조용하고 더 오래가는 걸 노린다. 우리 집을, 배우자를, 심지어 자기 눈을 못 믿게 만드는 것. 그게 불안이고 공포와는 결이 다르다.

공포에는 대상이 있다. 어둠 속에 있는 무언가가 무섭고 불을 켜면 대개 그 무서움도 같이 사라진다. 불안은 대상이 필요 없거나, 있어도 끝까지 확인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한다. 다락방에서 나는 소리는 집이 그냥 삐걱거리는 걸 수도 있고 배우자의 해명은 앞뒤가 얼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은 눈을 돌릴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재배열된다. 이런 책들은 무서워할 괴물을 손에 쥐여주지 않는다. 대신 의심을 건네고 독자가 직접 괴물을 조립하게 놔두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괴물은 책을 덮는다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래 소개할 책들이 전부 그렇다. 가장 잔인하거나 가장 무서운 책들은 아닐 수도 있다. 대신 이미 확인한 문을 한 번 더 잠그게 만들고 배우자와 나눴던 대화를 되짚으며 뭔가 놓친 게 없는지 곱씹게 만드는 쪽이다. 그 반응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결과다.

사람 신경을 제대로 긁는 책의 조건

오래 남는 불안을 만들어내는 책들에는 공통된 기술이 하나 있다. 무엇이 진짜인지 끝까지 확인해주지 않는다는 것. 평범한 공포 소설이라면 결국 유령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범인의 이름을 밝히거나 탐정이 트릭을 설명해준다. 사람을 진짜 불안하게 만드는 책들은 정반대다. 핵심 질문을 계속 열어둬서 그걸 매듭짓는 일이 작가가 아니라 독자의 몫이 되게 만들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뒤에도 그 풀리지 않은 질문을 계속 안고 다니게 한다.

두 번째 요소는 거리다. 이 목록에서 가장 무서운 배경은 버려진 정신병원이나 외딴 오두막이 아니라 결혼 생활이고 가족의 집이고 한 사람의 머릿속이다. 가면을 쓴 낯선 사람은 한 장면 동안만 무섭다. 반면 앞뒤가 살짝 안 맞는 남편의 이야기, 나에 대해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은 집은 그 사람과 계속 살아가는 매일매일이 무섭다. 가정과 심리를 배경으로 삼는 책이 이렇게까지 효과적인 이유는 불을 켠다고 피할 수 있는 위협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위협이 진짜 있다면 그건 이미 안에 들어와 있다.

세 번째는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의지하지 않을 도리도 없는 화자다. 엘리너든, 두 번째 드 윈터 부인이든, 블라이의 가정교사든, 독자는 그 사람의 시야 안에 갇힌 채로 책 한 권을 다 읽어야 하고 소설은 그 계정을 대조해볼 외부 시점을 하나도 내주지 않는다. 그 답답함이야말로 불안을 옮기는 통로다. 화자조차 확신이 없다면, 독자도 확신할 수 없다.

우리 집이 못 미더워지는 책들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두려움이 있다. 아래 세 편은 집이라는 존재 — 그 방들, 그 구조, 그 내력 — 을 눈을 뗄 수 없는 뭔가로 바꿔놓는다.

『힐 하우스의 유령』 — 셜리 잭슨 (1959)

몬터규 박사는 연약하고 외로운 엘리너 밴스를 포함한 손님 셋을 힐 하우스로 초대해 여름을 함께 보내게 한다. 이 저택은 살던 가족이 자기 집에서조차 안정감을 못 느끼길 바랐던 설계자가 일부러 어긋난 각도로 지은 건물이다. 잭슨은 이 집이 정말 귀신 들린 건지, 아니면 무너지고 있는 게 엘리너의 정신 쪽인지 끝까지 확정해주지 않고 두 가지 해석 모두 마지막 페이지까지 똑같이 성립한다는 게 이 소설의 진짜 재능이다.

『힐 하우스의 유령』이 이만큼 효과적인 이유는 흔히 상상하는 괴물 같은 걸 하나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얼굴 달린 유령은 없다. 어둠 속에서 손을 잡았는데 방 안 누구의 손도 아닌 것 같은 순간이 있고 벽에 쓰인 글씨는 엘리너 자신의 필체 같기도 하다. 잭슨은 이 집이 팔십 년 동안 “제정신이 아닌 채로” 서 있었다고 묘사하는데 그 표현은 이 집에 가장 최근에 발을 들인 사람에게도 똑같이 들어맞는다. 책을 덮을 즈음이면 위협이 애초에 엘리너 바깥에 있긴 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지고 그 불확실함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다.

『레베카』 — 대프니 듀 모리에 (1938)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화자는 부유하고 어두운 맥심 드 윈터와 결혼해 그의 저택 맨덜리로 들어가지만 집 전체가 여전히 일 년 전 물에 빠져 죽은 첫 아내 레베카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가정부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의 방을 마치 성지처럼 그대로 보존해두고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새로운 드 윈터 부인은 절대 레베카에 못 미친다는 걸 분명히 느끼게 만든다.

듀 모리에는 초자연적인 장치 없이 오로지 비교만으로 불안을 쌓아 올린다. 화자는 방 하나를 들어가도, 옷 한 벌을 골라도, 손님 한 명을 맞이해도 레베카의 우월한 존재감이 집 안 표면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걸 느낀다. 여기서의 공포는 지극히 가정적이고 지극히 심리적이다. 모든 면에서 죽은 여자의 소유인 집, 그리고 자기 결혼 생활에서 오히려 자신이 침입자인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하는 산 아내.

『멕시칸 고딕』 — 실비아 모레노가르시아 (2020)

노에미 타보아다는 사촌이 “이 집이 나를 독살하고 있다”는 섬뜩한 편지를 보내오자 멕시코 시골에 있는 낡은 식민지풍 저택 하이 플레이스로 향한다. 추워질 이유가 없는 나라인데 하이 플레이스는 이상하게 춥다. 그 집을 소유한 가문은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앞뒤가 안 맞는 관습을 고집하고, 벽 자체가 숨을 쉬는 것 같다는 느낌은 점차 비유가 아니게 된다.

모레노가르시아는 집 자체에 생물학적인 실체를 부여해 위협으로 만든다. 곰팡이와 균류, 그리고 집과 함께 대물림된 부패가 가문 사람들의 정신까지 감염시켰고 노에미는 독자와 마찬가지로 소설 대부분에서 자신이 진짜 음모를 파헤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서서히 중독되어 그런 음모를 상상하게 된 건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소설 후반 바디 호러로 답이 드러날 즈음이면 이 집은 이미 독자에게도 제 할 일을 다 마친 뒤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못 미더워지는 책들

이 세 편에서 가장 무서운 건 낯선 사람이 아니다. 저녁 식탁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고 그동안 그 사람을 완전히 잘못 읽어온 건 아닌가 하는 서서히 커지는 끔찍한 의심이다.

『비하인드 클로즈드 도어스』 — B. A. 패리스 (2016)

잭과 그레이스 엔젤 부부는 완벽한 커플처럼 보인다. 항상 다정하고 옷차림도 단정하고 저녁 모임에는 늘 함께다. 하지만 패리스는 거의 첫 장부터 그 다정함이 사실 우리라는 걸 드러낸다. 잭은 그레이스의 삶을 일 초 단위로 통제하고 있고 소설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되는 매력적인 모습과 둘만 있을 때의 끔찍한 현실을 정신없이 오가며 어느 쪽도 진짜라고 마음 놓고 믿지 못하게 만든다.

여기서의 불안은 진실을 모른다는 데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이 뻔히 눈앞에 있는데도 그레이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걸 못 알아채는 걸 지켜봐야 한다는 데서 온다. 패리스는 독자를 아주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두려움의 공범으로 만든다. 지금껏 참석했던 어느 파티에서든 가장 그럴듯하게 행복을 연기하던 그 커플이 어쩌면 잭과 그레이스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이 책 속 다른 인물들처럼 우리 역시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더 푸시』 — 애슐리 오드레인 (2021)

블라이스 코너는 모성이 차가웠던 집안의 대물림을 끊어내겠다고 다짐하며 엄마가 되지만 딸 바이올렛은 갓난아기 때부터 어딘가 일부러 잔인한 것처럼 느껴진다. 남편 폭스를 포함해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오드레인은 바이올렛이 정말 위험한 아이인지, 아니면 자신의 엄마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불안정함 때문에 블라이스가 없는 위협을 상상하고 있는 건지 끝까지 확인해주지 않는다.

『더 푸시』가 이토록 찜찜한 이유는 이미 수많은 부모가 조용히 품고 있는 두려움을 정확히 겨냥하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가 무섭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자기 아이에 대한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신을 키운 불안정한 엄마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이다. 블라이스가 사건을 하나씩 얘기할 때마다, 주변에서 과민 반응이라고 다독일 때마다 불안은 계속 쌓이고 결국 블라이스의 말과 다른 모두의 말 중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나의 여동생, 연쇄살인마』 —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2018)

코레데는 이번까지 벌써 세 번째로 여동생 아욜라의 뒷수습을 했다. 남자친구 세 명, 시신 세 구, 그리고 갈수록 믿기 힘들어지는 정당방위 해명 세 번. 아욜라가 코레데가 오래 마음에 품어온 의사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자 코레데는 더는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동생을 언제까지 감싸줄 수 있을지 결정해야 한다.

브레이스웨이트의 날카롭고 종종 웃기기까지 한 문장 덕분에 불안은 슬그머니 스며든다. 자매의 티격태격을 몇 페이지나 웃으며 읽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코레데처럼 독자 자신도 진짜 살인범일 수도 있는 사람을 위해 변명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 소설의 진짜 불안은 아욜라가 몇 명을 해쳤는지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증거조차 애정과 의리 앞에서는 이렇게 쉽게 합리화된다는 사실을 지켜보는 데 있다.

내 정신 자체가 못 미더워지는 책들

가장 끈질긴 불안은 집이나 배우자를 향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지각을 애초에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불안이다. 아래 세 편은 독자의 이 확신 없음을 이야기 전체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삼는다.

『노란 벽지』 — 샬럿 퍼킨스 길먼 (1892)

의사 남편이 “신경성 우울”이라고 이름 붙인 증상에서 회복 중인 한 여성은 벗겨지고 색이 바랜 노란 벽지가 있는 방에 갇혀 일도, 글도, 외출도 금지당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녀는 벽지 무늬 뒤에 갇힌 여자가 벽을 기어다니며 밖으로 나오려 애쓰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길먼은 당대의 “휴식 치료”를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고 짧은 분량 안에서 화자의 감금이 순식간에 광기인지 통찰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변질되는 솜씨가 이 작품의 재능이다. 정신을 놓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걸까. 여기서의 불안은 말 그대로 폐소적이다. 방 안에 갇혀 자신이 무너지는 과정을 스스로 서술하는 여자, 그리고 위로처럼 들리다가 점점 통제처럼 들리기 시작하는 남편의 말들.

『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1898)

한 가정교사가 아이 둘을 돌보러 외딴 영국 저택에 도착한 뒤, 예전에 그 집에서 일했던 두 하인의 유령이 아이들을 타락시키려 한다고 확신하게 된다. 제임스는 유령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고립된 채 점점 집착이 심해지는 가정교사가 아이들에 대한 자신의 통제를 정당화하려고 위협을 지어낸 건지 끝까지 확인해주지 않는다.

백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평론가들조차 어느 해석이 맞는지 합의하지 못하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중편은 여전히 순도 높은 불안의 재료로 작동한다. 제임스는 믿을 만한 이유와 못 믿을 이유를 동시에 가진 화자를 던져주고는 영원히 어느 쪽으로도 판정을 내리지 않는다. 다 읽고 나서 확신할 수 있는 건 블라이 저택에서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는 사실뿐이다. 그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이창의 여인』 — A. J. 핀 (2018)

트라우마 이후 술에 의존하며 광장공포증을 앓는 애나 폭스는 매일 카메라 렌즈로 이웃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공원 건너편 집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걸 목격했다고 믿게 된다. 아무도 애나를 믿지 않고 애나 자신조차 자기 기억이 눈에 띄게 흐릿하다는 걸 알고 있다. 소설은 애나와 독자 모두를 정말 뭔가를 본 게 맞는지에 대한 의문 안에 계속 가둬둔다.

핀은 두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불안을 쌓는다. 애나는 자신이 본 걸 믿지 못하고 독자는 애나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인물이 건네는 위로 한마디 한마디에도 이중의 의심이 따라붙는다. 소설의 반전은 서사 전체를 다시 보게 만들지만 결국 남는 찜찜함은 사건의 해답 자체보다, 더 나은 대안도 없이 한 사람이 자기 삶에 대해 하는 말을 이만큼 철저히 의심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왜 자꾸 불안한 책을 골라 드는가

책장을 덮은 뒤에도 따라와서 이미 확인한 문을 한 번 더 잠그게 만드는 감정을 일부러 찾아 나선다는 건 이상한 일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정확히 이런 경험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고 밤에 불을 켜둔 채 잠들게 만든 책을 서로에게 추천한다.

이 즐거움의 일부는 진짜 불안에는 없는 종료 버튼이 허구의 불안에는 달려 있다는 데서 온다. 엘리너 밴스가 남긴 찜찜함을 그대로 안은 채로도 책을 덮고 집 안 불을 전부 켜고 힐 하우스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경계가 있기 때문에 이 경험은 그냥 괴로운 게 아니라 즐길 만한 게 된다. 책이라는 울타리 없이 마주쳤다면 그냥 불안 그 자체였을 감정을 통제된 양만큼만 맛보는 셈이다.

일부러 자기 확신을 흔들어보는 소설에는 나름의 쓸모도 있다. 일상은 대체로 자기 기억, 배우자, 자기 집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 위에서 굴러가는데 그 신뢰는 계속 시험하며 살면 너무 피곤해서 평소에는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런 책들은 몇백 페이지 동안 그 시험을 안전하게 대신 해준다. 실력 있는 작가가 온 힘을 다해 현실을 붙든 손을 느슨하게 만들려 할 때 그 손이 실제로 얼마나 단단한지 확인해보는 데는 묘한 만족감이 있다.

생산적인 불안과 그만 읽어야 할 책 구별하기

찜찜한 책이라고 해서 다 그 찜찜함을 잘 쓰고 있는 건 아니고 그 차이는 정확히 짚어둘 필요가 있다. 생산적인 불안은 의도를 가지고 쌓아 올린다. 작가가 확답을 미루는 건 그 모호함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고 화자의 손아귀가 풀리는 와중에도 작가가 전체를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은 대체로 느껴진다. 다 읽고 나서도 확신은 없지만 그 불확실함이 허술해서가 아니라 정당하게 얻어낸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 읽어야 할 버전은 다르다. 반전을 만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정보 은닉, 심리적 근거 없이 그냥 제멋대로인 신뢰 불가능한 화자, 작가 스스로 무엇이 진실인지 정하지 못해서 끝내 아무것으로도 수렴하지 않는 막연한 불안. 어떤 책이 찜찜하긴 한데 그게 그냥 플롯이 허술해서 그런 것 같다는 의심이 든다면 그때가 덮어도 될 합리적인 순간이다. 이 목록의 책들은 전부 그 시험을 통과한다. 각자 정확히 어떤 의심을 쌓고 있는지, 왜 그걸 끝까지 풀지 않기로 했는지 다 알고 있다.

불안하게 만드는 책들은 대부분의 소설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걸 요구한다. 답이 주는 안도감 대신 풀리지 않은 의심을 그대로 안고 있으라는 것. 불편하도록 설계된 경험이지만 계속 이런 책으로 돌아오는 독자라면 이것 역시 소설이 건넬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선물 중 하나다. 확신이라는 게 일상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드물고 훨씬 쉽게 깨진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불안했던 책도, 마음이 무너졌던 책도, 그 사이 모든 감정도 기록해보세요. Bookdot은 완독 여부뿐 아니라 그 책이 실제로 어떤 감정을 남겼는지 기록하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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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책이 그냥 무서운 것과 불안하게 만드는 것, 뭐가 다른가요?
공포는 대상이 있다. 위협이 존재한다는 확신에서 온다. 불안은 그 위협이 진짜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때 생긴다. 사람을 오래 불안하게 만드는 책들은 끝까지 확답을 주지 않는다. 화자가 맞을 수도 있고, 서서히 무너지고 있을 수도 있고, 아무 문제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만 제정신일 수도 있다. 그 판단을 끝까지 미루기 때문에 책을 덮은 뒤에도 그 찜찜함이 집 안 복도까지 따라온다.
심리 공포 소설을 읽고 며칠씩 찜찜한 게 정상인가요?
그렇다. 오히려 소설이 의도대로 작동했다는 신호에 가깝다. 이런 책들은 원래 안전하다고 믿었던 공간 — 우리 집, 우리 관계, 우리 자신의 감각 — 에 대한 감을 슬쩍 흔들어놓기 때문에 이야기가 끝났다고 그 여운까지 같이 끝나지는 않는다. 며칠 정도 시간을 두고 화자가 확실하고 안정적인 다른 책으로 넘어가면 대체로 가라앉는다.
심리 공포와 그냥 스릴러는 어떻게 다른가요?
스릴러는 보통 눈에 보이는 외부의 위협을 던져주고 행동이나 반전을 통해 그걸 해결하며 끝난다. 심리 공포는 애초에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확신 자체를 흔드는 데 더 관심이 있다. 위협의 정체가 사람일 수도, 집일 수도, 화자 자신의 정신일 수도 있는데 소설은 끝까지 그중 무엇인지 완전히 확인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모호함은 이 장르가 허술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쓰는 핵심 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