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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에서 말 꺼내면 논쟁 붙는 순수문학 소수 의견

Bookdot Te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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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커버 소설책이 빼곡히 꽂힌 조용한 도서관 서가

순수문학은 평판 문제를 양쪽에서 동시에 안고 있다. 옹호하는 쪽에게 이 장르는 서점에서 가장 진지한 구역이다. 문장을 바늘끝처럼 벼리고 오래 남을 이야기를 쓰려는 소설이 모인 곳이다. 비판하는 쪽에게는 우울한 지식인들이 나오는 느리고 자의식 과잉인 책들의 서가다. 멀리서 감탄이나 하다가, 원치도 않은 사람에게 권장도서로 떠넘겨지는 책들이다.

두 진영이 깔고 있는 전제는 사실 같고, 그 전제 대부분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허술하다. 북클럽과 댓글창과 북톡을 오가며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규칙처럼 굳었다. 문학은 느리다. 어려운 책은 재밌는 책보다 대접받아야 한다. 정이 안 가는 주인공은 결함이다. 표지에 붙은 상 딱지는 품질 보증서다.

아래 여섯 가지 의견은 이 통념에 반기를 든다. 모든 순수문학이 훌륭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별로인 책도 많다. 주장은 그보다 좁다. 이 장르의 실패를 두고 사람들이 탓하는 특징들은 대개 특정한 책의 문제이고, 성공한 책에서는 같은 특징이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플롯은 순수문학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플롯이 없다고 깊은 것도 아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지 신경 쓰는 소설일수록 덜 문학적이라는 생각이 끈질기게 남아 있다. 플롯은 스릴러의 몫이고, 순수문학은 분위기와 목소리와 의식의 결을 다룬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책이 사건이 많은 책보다 더 진지하게 취급되기도 한다.

독자가 몇 년씩 들고 다니는 책을 보면 이 생각은 맥을 못 춘다.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은 첫 페이지에서 누가 죽는지 알려주는데도 추진력이 대단하다. 진짜 궁금증은 고전학과 학생들이 어떻게 거기까지 갔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에밀리 세인트 존 맨델의 『스테이션 일레븐』은 팬데믹 이후의 풍경을 가로지르는 셰익스피어 극단을 따라가는데, 연결고리를 한 조각씩 맞춰가는 미스터리처럼 흘러간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는 소설이 낼 수 있는 가장 조용한 목소리를 가졌으면서도, 헤일셤의 학생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서서히 드러나는 과정이 책 전체의 엔진이다.

이 소설들에서 플롯은 시장에 내준 양보가 아니다.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 그 자체다. 다음 장이 궁금한 독자는 책이 던지는 가장 어려운 질문 앞에서도 자리를 지킨다. 실패는 반대편에서 일어난다. 문장은 아름다운데 그 밑에서 누르는 힘이 없는 소설은, 잘 짠 미스터리보다 깊은 책이 아니다. 정지 상태가 멀리서는 진지함으로 보여서 깊이로 착각하기 쉬울 뿐이다.

비호감 화자가 구원받을 의무는 없다

“인물에 공감이 안 됐다”는 말은 순수문학을 싫어하는 가장 흔한 이유가 됐고, 북클럽에서는 때로 판결문처럼 들린다. 화자가 차갑거나 옹졸하거나 자기 파괴적이면 응원할 사람을 주지 못한 책이 실패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좋아하라고 만든 게 아닌 화자는 이 형식이 가진 가장 오래된 도구 중 하나다. 오테사 모시페그의 『내 휴식과 이완의 해』는 밀레니엄 전환기 맨해튼에서 엄청난 양의 약을 먹고 일 년을 통째로 자버리려는 젊은 여성을 따라간다. 그녀는 냉소적이고 특권층이며 자주 못되게 군다. 소설은 그녀를 용서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의 무감각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이해해보라고 청한다. 훨씬 더 흥미로운 요청이다.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에는 후루쿠라 게이코가 나온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충분히 만족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왜 그러면 안 되느냐고 끊임없이 캐묻는다. 흔히 말하는 의미의 공감 가는 인물은 아니다. 그런데 그녀의 투명한 시선이 주변의 기대가 얼마나 이상한지 드러내기 때문에 책이 작동한다.

따라서 물어야 할 건 화자가 마음에 드느냐가 아니라, 책이 그 화자로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느냐다. 실수로 불쾌한 인물은 결함이다. 독자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하려고 일부러 불쾌하게 만든 인물은 기술이다. 둘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면 우리가 가진 가장 가차 없는 소설 몇 편을 읽을 수 없게 된다.

표지의 상 딱지는 보증서도 숙제도 아니다

문학상 시즌에는 독특한 죄책감이 생긴다. 부커상 수상작이 협탁에서 읽히지 않은 채 은근히 나무라고, 퓰리처상 후보작은 체크리스트가 된다. 상은 과제처럼 느껴지고, 책을 끝내는 일은 즐거움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여기엔 두 가지가 동시에 참이다. 상은 취향이 제각각인 소수 심사단이 정하니, 수상은 그 심사위원들에 대한 신호일 뿐 독자 자신에 대한 보증은 아니다. 그리고 수상작이 다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바버라 킹솔버의 『데몬 코퍼헤드』는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애팔래치아로 옮겨 다시 쓴 소설로, 2023년 퓰리처상 소설 부문을 받았고 밤새 읽게 만드는 책처럼 읽힌다. 조지 손더스의 『바르도의 링컨』은 2017년 부커상을 받았다. 워싱턴의 묘지에 모인 유령들의 합창으로 짜인 형식이 낯설지만, 어렵다는 평판보다 훨씬 더 뭉클하고 장난기가 넘친다.

합리적인 태도는 상을 책을 집어 들 이유로만 삼고 끝까지 읽을 이유로는 삼지 않는 것이다. 수상작이라도 백 쪽에서 덮어도 된다. 제도 전체를 무시하고 끌리는 책을 읽어도 된다.

오토픽션은 자기 배꼽 응시가 아니다. 소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 형식이다

오토픽션만큼 조급한 반응을 끌어내는 범주도 드물다. 작가를 닮은 화자가 작가의 삶을 닮은 삶을 돌아보는, 회고록과 허구의 혼합이다. 흔한 불만은 문학이라는 알리바이를 단 자기 탐닉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일기를 소설이라고 내놓았다는 식이다.

그런 작품도 있다. 하지만 이 형식은 서사에 대한 진짜 질문이 있었기에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레이철 커스크의 『윤곽』은 자신에 대해 거의 설명하지 않는 작가가 화자인데, 대신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이 말을 하게 둔다. 소설은 타인의 삶으로 지어지고 화자는 중심에서 일종의 부재가 된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여섯 권짜리 『나의 투쟁』은 까다로운 아버지의 죽음을 포함해 평범한 삶의 볼품없는 세부를 최면 같은 글로 바꿔놓는다. 플롯이 보통 해주는 다듬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책을 싫어해도 틀린 게 아니다. 자기 뼈대를 스스로 해체하는 소설을 모든 독자가 원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냥 작가가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라는 말은 좋은 작품에서 벌어지는 일을 잘못 묘사한다. 그곳의 진짜 주제는 우리가 경험을 이야기로 바꾸는 방식,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사라지는가다. 일기가 아니라 형식을 둘러싼 논증이다.

120쪽짜리 소설은 가볍지 않다

짧은 순수문학에는 묘한 이중 잣대가 붙는다. 책이 길면 야심이 있다고 여기고, 얇으면 쉽다고 여긴다. 쪽수가 그 안에 든 것의 무게를 재는 잣대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약 백 쪽 분량이고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1985년 아일랜드의 한 마을에서 석탄 상인 빌 펄롱이 지역 수녀원에서 모른 척할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이야기다. 군더더기 없고 거의 모든 문장이 무게를 지고 있어서 오래 남는다. 짧다는 건 야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독자에게 일부를 맡기겠다는 요구다.

짧은 책은 순수문학 서가에 들어서는 가장 부담 적은 길이기도 하다.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럴듯한 논거다. 독서 습관을 쌓거나 이런 소설이 맞는지 가늠하는 중이라면, 하룻밤에 끝낼 수 있는 한 권이 중간에 접게 될 육백 쪽짜리보다 자기 취향을 더 많이 알려준다. 길이가 알려주는 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뿐이다.

번역 문학은 의무가 아니다. 서가에서 가장 가성비 좋은 구역이다

번역 소설에는 몸에 좋은 약이라는 부당한 인상이 따라붙는다. 차갑거나 문화적으로 멀거나, 모국어로 쓴 책보다 품이 더 들 것이라는 걱정이다.

기록은 정반대를 말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데버라 스미스의 번역으로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받았고, 한 번에 읽히지만 몇 달을 곱씹게 되는, 지난 십 년 사이 가장 인상적인 짧은 소설로 남아 있다. 한강은 이후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무라타의 『편의점 인간』은 웃기고 빠르고 손에서 내려놓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성품을 닦으려고 읽는 책이 아니다. 하나의 문학 문화권 안에서 쓰인 소설이 좀처럼 주지 못하는 방식으로 놀라게 해서 읽는 책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한 언어로만 읽는 독자가 접하는 건 지금까지 쓰인 글의 극히 일부다. 번역은 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이 플롯으로 통하는지, 문장이 어떤 느낌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전혀 다른 전제를 얻는 길이다. 어떤 번역이 와닿지 않는다면 그건 대개 그 번역의 문제이지 번역 문학 전체의 문제가 아니다.

시간을 들일 만한 순수문학과 그렇지 않은 책의 차이

이 모든 얘기가 느린 소설이 다 숨은 명작이라거나 수상작이 전부 서가 자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범주를 통째로 물리치거나 무조건 옹호하는 데 쓰이는 논리가, 좋은 반례 하나만 들이밀어도 무너진다는 뜻이다.

플롯이 핵심일 수 있다. 나쁜 화자가 성취일 수 있다. 상은 무시해도 된다. 오토픽션은 진지한 형식 논증일 수 있고, 짧은 책이 묵직할 수 있고, 번역 소설이 올해 가장 재밌는 책일 수 있다. 어느 경우든 쓸모 있는 질문은 그 책이 순수문학의 규칙을 따랐느냐가 아니다. 그 책이 자기가 내린 선택을 일부러 했느냐, 그 선택이 대가를 치렀느냐다.

이 기준은 구호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유명한 책이 얄팍하다고, 조용한 책이 비범하다고 알려줄 때도 있다. 그래도 『나를 보내지 마』에도, 친구가 입이 닳도록 추천하는 얇은 소설에도 똑같이 통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숙제 더미 같은 서가로 떠밀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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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은 뭐가 다른가요?
순수문학은 문체와 인물의 내면, 주제의 깊이를 장르 규칙보다 앞에 두는 소설을 느슨하게 가리키는 말이다. 경계는 흐릿하다. 『스테이션 일레븐』이나 『나를 보내지 마』는 SF의 요소를 많이 빌리면서도 문학 쪽 서가에 꽂힌다. 그래서 많은 독자가 이 구분을 칼로 자른 경계가 아니라 무게중심의 차이로 받아들인다.
진지한 독자가 되려면 순수문학을 좋아해야 하나요?
그렇지 않다. 진지한 독서는 어떤 서가에서 책을 고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집중해서 호기심을 갖고 읽느냐에 달려 있다. 로맨스, 스릴러, 판타지만 읽으면서도 아주 꼼꼼하게 읽는 사람은 많다. 순수문학은 여러 독서 방식 중 하나이고, 시도해볼 가장 좋은 이유는 특정한 책이 궁금해서이지 권위가 있어서가 아니다.
순수문학이 부담스러운 독자는 어디서 시작하면 좋을까요?
짧고 속도감 있는 책이 좋다.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는 모두 분량이 작고 감정이 직접적이라 주말 안에 끝낼 수 있다. 얇은 책 한 권을 끝냈다는 경험이, 팔십 쪽에서 포기한 유명한 벽돌책보다 자신감을 훨씬 많이 키워준다.